brunch

카라바조의 예술을 성숙시킨 4년: 1588년-1592년

카라바조의 예술을 성숙시킨 4년: 1588년-1592년


1584년부터 약 4년간의 도제 생활을 통해 그림을 익힌 카라바조는 1588년에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났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4년이란 시간은, 소위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경지에 오르기에는 충분하다고 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이제 갓 무엇인가를 시작한 한 사람이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기에 4년이란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을 만큼 부족하기만 한 짧디 짧은 시간일 뿐이다.

더욱이 그 시간이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십 대 시절의 4년이라면 재고해 볼 가치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라바조에게 있어 4년이란 시간은 우리들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1588년 열일곱 청소년기의 끝 무렵에 들어선 카라바조는 더 이상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 머물지 않았다.

화실 문 밖의 세상에는 머물 곳도, 반겨 맞이할 사람도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카라바조는 세상을 향해 걸음을 당당하게 내디뎠다.

카라바조는 진정으로 ‘화가로서 스스로 홀로 설 수 있기’를 원했기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제 두세 해만 더 지나면 카라바조의 나이 스물이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열일곱이란 ‘아직’이라는 울타리 안에 숨어 지내고 있을 나이이겠지만 카라바조의 열일곱은 ‘벌써’라는 부사의 수식이 필요한 나이였다.

카라바조는 스물이 되기 전에 화가로서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홀로 설 수 있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실의 문을 활짝 밀어 제치고 바깥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나가야만 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적인 화가로써 활동하기 위해서는 알을 깨뜨리고 바깥세상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카라바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카라바조가 그렇게 결정한 것에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는 더 이상 익힐 것이 없다고 느꼈거나, 화실에 소속된 다른 도제(들)와 모종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화실을 떠난 후의 카라바조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화실을 떠난 것은 오직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으려는 뜨거운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아직은 솜털조차 제대로 벗지 못한 십 대의 청소년에 불과하였지만, 카라바조가 가슴에 품고 있는 야망은 결코 십 대 청소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라바조는, 스물이 되려고 해도 아직 이삼 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가진 것 넉넉하지 않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자신의 형편을 잘 알면서도, 화실이라는 둥지를 떠나 혼자서 독립한다는, 나이로 보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쩌면 카라바조가 내린 그때의 결정은 그가 아직 ‘십 대의 청소년’이었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살아보면 알게 된다.

용기와 무모함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그것들이 혼재되어 뒹굴었던 그 시기가 정말로 좋았다는 것을.


이유야 어찌 되었건 화실을 떠나기로 한 1588년 카라바조의 결정은 결국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사에 방점 하나를 짙게 찍어 넣은, 한 줄의 굵고 긴 획을 쭉 그려 넣은, 위대한 화가 카라바조’가 탄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카라바조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난 1588년에서부터, 1592년에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입성할 때까지, 약 4년 동안을 더 밀라노와 그 인근 지역에서 머물렀다.

롬바르디아 주(주도는 밀라노이다.)가 자리 잡고 있는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은 카라바조의 예술을 탄생시키고 길러낸 원천이다.

1588년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난 열일곱 살의 카라바조는, 4년이 지난 1592년, 야망을 가슴에 가득 품은 스물하나의 청년 카라바조로 성장하였다.

벌써 스물 하나가 되었다.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나고 나서 지난 4년 동안 화가로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세상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이미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갓 도제 생활을 마친 풋내기 십 대의 무명화가이기에 제대로 된 후원이나 작품의 의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원인은 밀라노가 예술에 있어 로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시장의 규모 또한 너무 작기 때문이라고 카라바조는 생각했다.


“아 그렇지. 로마가 있지. 로마로 가야겠어. 로마에서라면 분명 나의 그림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젊은 날의 야망은 흔히 조바심으로 이어지기 일쑤이다.

4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십 대의 청소년 카라바조가 이십 대의 청년 카라바조가 된 것처럼,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의뢰받지 못한 채로 금방 서른이 되고 이내 마흔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밀라노가 태생적으로나 화가로서나 고향과도 같은 곳이긴 하지만 더 이상 머물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라노는 젊은 날의 카라바조를 무력하게 만들 뿐이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서쪽 능선에 가물가물하게 걸린 길어진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아름다운 법이다.

카라바조의 떠남은 밀라노로서는 동쪽을 향해 길어진 저녁노을과도 같았지만 로마로서는 서쪽을 향해 길게 드리운 새벽녘의 여명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그날 화구를 짊어진 채로 로마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카라바조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이 괜히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럴 때면 눈시울이 좀 붉어진다고 해도 행여 부끄러워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카라바조의 일생에서 1588년부터 1592년까지, 열일곱 살에서부터 스물한 살까지, 이 4년의 기간은 오늘날로 치자면,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사과정을 공부하는 기간에 해당한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경우, 그리고 대학교에서도 4년 만에 바로 졸업하는 경우라면, 대학교에 재학하는 기간이 일반적으로 ‘18살에서 22살까지’이거나, 생년월일에 따라서는 ‘17살에서 21살까지’이다.


따라서 1571년 9월생인 카라바조에게 ‘1588년부터 1592년까지’의 4년이란 기간은, 카라바조의 나이로는 17살에서부터 21살까지였기에, 오늘날의 미국식 교육 시스템에서는 ‘대학교에 재학하는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리고 한 사람이 어떤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과정에서,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이 기간이 갖는 의미가 아주 특별하다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이 기간 동안에 있었던 카라바조의 행적 또한 그 이전의 행적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도제기간을 마쳤다는 꼬리표를 갓 떼어낸 무명의 화가 카라바조에게 이 4년이란 기간은,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에서 도제로 지내며 그림을 익혔던 4년의 시간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카라바조에게, 1584년-1588년(13살-17살)이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에서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교육을 받았던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익힌 기간’이었다면, 1588년-1592년(17살-21살)은 카라바조가 독학을 통해 스스로 성숙된 화가로 거듭난 ‘독립적인 화가로 성장한 성숙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회화예술에 있어 ‘전문적인 화가’가 되는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한 것이 아니라, 대학교와 같은 전문적인 교육기관에서의 교육을 통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당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카라바조와 같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에게는, 이름 있는 화가 개인이 운영하는 화실에서의 도제생활을 통한 기본적인 ‘익힘의 기간’과 이후 독학을 통한 ‘성장과 성숙의 기간’이면, 화가로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남다른 자신만의 회화기법을 창조하는 것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카라바조는 4년간의 독학을 통해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대학교육을 마친 셈이다.

4년의 시간 동안 스스로에 의해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이뤄낸 카라바조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밀라노를 떠나 세상의 중심이자 ‘영원의 도시’인 로마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스물한 살의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간 것에 대해 카라바조의 사생활과 결부된 다른 부정적인 요인이 관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문헌들이 있긴 하지만, 카라바조가 로마로 간 것은 신으로부터 애초에 부여받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때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렇게 해야만 했던, 카라바조의 운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밀라노에는, 피 끓는 스물한 살의 카라바조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았다.

로마는 카라바조가 예술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날카로운 채찍을 사납게 휘두르기도 했지만 명예와 금전적 보상이라는 유혹이 사방에서 카라바조의 손을 잡아끈 애증의 메트로폴리탄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카라바조의 고등학교 시절: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