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무기여 잘 있거라>: 비교분석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무기여 잘 있거라>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삶을 묘사한 대표적 작품’이라는 동일한 선상에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감정’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각도와 지점에서 포착하면서 그 묘사와 전개에서 작지 않은 차이를 갖고 있다.
1926년 작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전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이미 망가져 버린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마치 정지된 것과도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정지된 삶의 초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와는 달리 1929년 작인 <무기여 잘 있거라>는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인 세상을 배경으로 ‘망가져 가는 세계, 망가질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도피하려다가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도피와 파국을 그려낸 한 편의 서사’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 두 소설을 통해 로스트 제너레이션을 단지 ‘전후의 세상에서 좌절하고 방황하는 세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후에도, 전쟁 속에서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허망한 사회와 그릇된 시대가 만들어 낸 부조리한 상황에 빠져 버린 안타까운 세대’, ‘전쟁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그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만 하는, 그런데도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빠져 버린 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전쟁은 이미 끝난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이 남긴 상처로 인해 주인공 제이크 반스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의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제이크 반스는 전쟁으로 인해 성적 능력을 잃어버렸다.
젊은 남자가 성적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장애를 넘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일상으로의 복귀 가능성 자체가 훼손된 것이기에 결국 사회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제이크 반스는 전쟁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파리와 스페인을 떠돌면서 술을 마시고 투우를 관람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지내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단지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덮기 위한 행위를 반복하는 '의미 없는 짓'일뿐이다.
전후의 세계는 물리적인 상처를 덮으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제이크 반스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가 가졌던 물리적 상처는 이미 덮였지만 진정한 그의 상처는 영혼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제목처럼 태양은 언제나처럼 다시 떠오르고 세상은 상처를 회복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태양의 빛은 개개인이 입은 상실로부터 회복을 보장하는 빛은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가 구원하는 것은 세상일 뿐이지 개개인은 아닐 수 있다는 종교적 허무감에 맥락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의 이와 같은 텍스트들의 전개는 전후 세대가 느낀, 그곳에 있긴 하지만 그곳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적 정지 상태’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이야기의 시점과 사건의 전개를 바라보는 각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 중의 세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는 총성과 포성, 부상과 죽음의 공포가 일상인 전선의 한 모서리에서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사장에 빠졌다.”라는 텍스트보다는 “사랑에 매달렸다.”는 텍스트가 더 적절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이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현실의 것이 되었다는 점에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현 가능성'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잔혹하게 만들고 있다.
사랑이란 것도, 그 상황에 따라서는, 전쟁의 잔혹성과는 모습만이 다를 뿐 결코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프레드릭 헨리는 군에서 탈영하여 캐서린 바클리와 함께 전쟁을 피해 중립국으로 도망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막상 전쟁을 피해 달아난 곳에는 전쟁만큼이나 잔인한, 전쟁보다 더 잔인한 운명이 죽음으로 이끈다.
전쟁에서의 죽음은 시운(時運)이나 지운(地運)에 따라서는 피할 수도 있지만, 운명으로 인한 죽음은 ‘이미 결정된 것’이기에 결코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운명으로 인한 죽음이 그 어느 것보다 더 잔혹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의 전개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와 같은 전개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일까.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 또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이 선택과 노력에 따라 자신이 속한 현재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회적 환상을 철저히 부정하려고 한 것일까.
로스트 제너레이션들의 무언의 절규가 프레드릭 헨리에게 이입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선택한, 현재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이 방아쇠를 자신을 향해 당기는 것뿐이었을까.
두 작품은 주인공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서도 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상처는 텍스트를 빌어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고 분위기를 통해 암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침묵하고, 인물들의 감정은 분위기와 대화 사이의 여백에 암시적으로 새겨져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상처를 입은 이후의 ‘무기력한 삶의 지속’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상처가 좀 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을 통해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부상과 출혈, 출산과 죽음을 통해 인물들의 상처가 직접적으로 텍스트화되고 있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남녀 간의 숭고한 감정과 행위조차도 절망의 과정 속에서 파괴되어 소용돌이친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전쟁이라는 폭력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성되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파괴되고 소멸해 가는 과정을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