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노래

새벽의 노래


어둠이 아직 검은 속살을 가린 시간, 살 마른 옷걸이에 걸려있던 늘어진 외투를 툭 던지듯 걸쳐 입고 현관문을 나선다. 머리 위 아득한 허공에서는 갓 새 살 돋으려는 짙은 코발트 빛 하늘이 달빛 내려앉은 남해 밤바다를 그려 넣으려는 듯 금빛 포말 떼 지은 여명을 희끗하게 칠해 넣고 있다.


발 딛는 걸음마다 푸름이 툭툭 튕겨 오르던 시절, 그 바다 남해의 푸름을 무척 좋아했었다. 세월을 먹어가다 보면 지난 어느 한 시절의 얘기란 게, 정말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랬으면 했던 것인지, 윤곽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우연히라도 행여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될 때면 “그랬을 수도 있다.”는 얼버무림에 슬쩍 심상을 기대며 위안을 찾게 된다.

아무튼 그 짙은 물빛을 떠올리는 무책임한 날이면 마치 바다의 정령이 부리는 농염한 주술에 아무런 조건 없이 빠져들곤 한다.


이성의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문득,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주술에 불쑥 빠지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이성이란 게 감성의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마련이고, 대게 주술이란 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감성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에 주술에 관해서라면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선 하나로 긋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해바다, 그 물빛의 반짝임은, 굳이 감성의 영역에 걸음 크게 딛지 않는다고 해도 결코 그저 무시해 버릴 만한 것이 아니기에, 그 주술에게 스스로를 맡기려는 감성을 이성이 용인한 것일 수도 있다.



새벽의 노래 /


골 얕은 레코드판의

컥컥 휘청대는 회전에 얹힌

무딘 바늘 같은 삶의 얘기가

이슬의 잠꼬대 같이

눅눅하게 차오르는 새벽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수분에 갇힌 채로

잔 호흡 몇 번 겨우 들이키다가

주섬주섬 머릿속을 더듬는다


계절이란 게

아무리 크게 저어 본들

잔 흐름 하나 만져지지 않는 것임을

익히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먼 허공을 향하려는 미련한 손짓을

차마 말리지 못한다


건널 수 없는

투명하고 얇은 경계면 앞에 서서

헤어짐에 무뎌진 호흡을

컥컥 내뿜다가

새벽의 뿌연 미망에 갇힌다



홀로 깨어난 이른 시간의 고요 속에서 초점 겨우 잡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하늘은 언젠가의 그날, 남해바다 물빛의 반짝임에, 어쩌면 살짝 중얼대다 말았을 잠시잠깐의 잠꼬대 같은 마법을 떠오르게 한다.

마냥 넋을 놓고 바라보던 남해바다의 그날에도, 저기 먼동이 검청색 하늘 한 편을 은빛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이 날의 새벽에도, 헤아리기조차 가마득한 시간이 벌써 지났지만, 아직도 삶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은 출발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것일까

연약해서 완벽하고

고민 많아서 완벽하고

허술해서 완벽하고

강해서 완벽한 것이

인간인 걸까


강하기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라면

살아남았기에 완벽한 것이란 말인가


어쩌면 누구나 지금의 모습 그대로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완벽한 것일 수 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해가며,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이어진 기나긴 글줄의 여행에서조차 아직 변두리만을 더듬고 있지만 이른 시간, 허공을 떠도는 안개가 새벽의 첫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행여 그 속으로 기웃기웃 고개 밀어 넣을 수 있지는 않을까, 주술을 걸어본다.


살아가다 보면 환상이란 게 헛된 것만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것은 환상의 공간을 유영하다 보면 때때로 현실에서의 나를 향하는 이성의 눈을 뜨게 되기 때문이다.


남해 바다를 향해 걸음 디딘 새벽의 산책길에서 조차 시간은 무수한 파편을 가슴에 박아 넣고 있으니, 때맞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인간이 이방인이 되고 방랑자가 되는 가 보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그저 '지나가는 삶의 나그네'가 '인생의 명인'이라 부를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일 수 있다고 또 다른 주술을 걸어본다.


“생각해 보니 문학과 철학, 이것들은 형체 없는 실존을 찾아가는 각성 강한 환각제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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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새벽은, 이것저것, 주섬주섬,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새벽잠이 줄어드는 것은,

살아갈 시간이 줄어든 만큼 생각할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돌이켜 생각해야 할 것들을 지천으로 늘어놓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 있겠다.

그 참, 머릿속을 맑게 하려는 건지

뒤죽박죽 흩트려 놓고 있는 건지,

첫물인지 끝물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또각또각 저곳을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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