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우안, 질서와 화려함의 무대

파리의 좌안과 우안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파리의 우안, 질서와 화려함의 무대


센강의 북쪽 지역인 우안은 남쪽 지역인 좌안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공간이다.

좌안이 질문과 철학이 있는 토론의 장이라면 우안은 화려한 사교의 무대이자 욕망의 영토이다.

우안은 패션과 예술이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공간이며, 그곳에서는 현실에서의 질서와 품격이 지고의 미학으로 숭배된다.


전통적으로 '왕의 길'이었던 우안은 권위와 자본을 바탕으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루브르 궁전에서 시작해서 오페라와 마들렌, 샹젤리제로 이어지는 우안에는 왕과 귀족, 정치인과 자산가, 성공한 예술가와 패션 디자이너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새겨 넣었다.


나폴레옹의 야망이 깃든 샹젤리제의 개선문과 화려한 백화점들은,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이룩할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우안은 우리에게 "어떻게 사회를 조직하고, 어떻게 축적된 부를 사용하며, 어떻게 질서와 품격을 눈에 보이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스만 남작의 도시 개조 이후 우안은 근대적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부르주아적 파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 오스만 남자과 파리 대개조 사업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의 도시 파리'를 구조적으로 완성한 것은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 남작이다. 파리의 지도를 완전히 새로 그려 넣은 '파리 대개조 사업(Travaux Haussmanniens)'은 19세기 중반, 오스만 남작이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시작한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근본적인 도시 계획 사업이다. */



우안: 세상의 질서를 세우는 권력의 축이자 질서와 화려함의 무대

파리 센강의 북쪽에는, 질서와 조화가 물질에 의해 정제된 공기가 흐르면서 "눈에 보이는 질서와 조화는 물질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우안이 자리 잡고 있다.

우안은 형이상학적 철학이 아니라 현실적 스타일이, 정신적 의문이 아니라 물질적 확신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증명하는 영토이다.


루브르 궁의 대리석과 방돔 광장의 주얼리들, 오페라 가르니에의 샹들리에는 완벽한 대칭과 질서, 품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질들이다.

대칭과 질서, 품위라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을 통해 현실에서 발현된 공간이 우안인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우안의 화려함 속에서 “근대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에게 우안의 거리는 인간의 영혼이 거울처럼 비치는 곳이었다.

“산책자(Flâneur)”는 도시를 걸으며 세상의 욕망을 관찰했고, 그 속에서 예술은 자본의 그림자처럼 태어났다.

샤를 보들레르에게 우안의 카페는 토론의 장소가 아니라 관찰의 무대였다.


/*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

샤를 보들레르는 파리 좌안과 우안의 경계에서 현대적 도시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날카로운 문학적 필체로 표현한, 현대 시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근대적 미술 비평가이다.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무대로, '오스만 남작의 파리 대개조 사업'(1853년 시작)로 인해 사라져 가는 '예전 파리'에 대한 상실감과 '새로운 파리'에서의 소외감을 '산책자'라는 인간상으로 포착해 내었다.

보들레르의 '산책자(Flâneur, 플라뇌르)'는 단순히 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넘어,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존재'이자 현대 도시라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 상식과 고독, 아름다움과 질서를 채집하는 현대적 예술가의 원형을 상징한다. */



좌안과 우안: 인간 안에 있는 두 개의 구역

좌안과 우안은 지리적 영역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가 차지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영토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유하는 이'의 영혼에는 '좌안의 카페'와 '우안의 거리'가 공존하고 있다.


좌안의 카페에 앉아 질문을 던지고 우안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사실 우안과 좌안은 너무나도 모순적이어서, 절대로 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지만, 파리는 그것들을 동시에 끌어안아 품는 '어미의 가슴 같은 넉넉한 마법'을 부리는 도시이다.


사람들이 파리에게 사로잡히는 이유는, 랭보가 파리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파리는 인간이 가진 모순조차도 일상의 모습인 양 포용하기에, 그래서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기에, 그래야만 하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파리의 바람이 센강의 수면에 물결을 일으킬 때면 영혼의 귀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만 좌안과 우안, 사유와 욕망의 경계 어딘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행여 놓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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