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안과 우안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는 모순적이기에 서로를 부정하는, 그러면서도 등 돌려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는, 하나의 도시 파리를 탄생시켰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기억하는 파리는, 우안에서 만나는 화려함과 그 속에서의 질서, 그 정도로만 남겨질 수 있다.
좌안의 눈에는 우안이 '화려함의 극치' 그래서 '가장 속물적인 공간', '파리이긴 하지만 파리여서는 안 되는 파리 속의 파리'였기에 우안에 대한 동경은 비판받아 마땅한 '속물근성의 발로'로 여겨졌다.
또한 우안의 눈에는 좌안이 '파리라고는 하지만 결코 파리가 아닌 변두리 동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이상주의자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파리의 변방'으로 비쳤다.
그 가운데에서는 늘 센강의 물살이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파리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볼 수 있다.
파리는, 우안과 좌안의 긴장이 있기에, 그 사이에서 센강이 경계를 두르고 있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지적이면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조화로우면서도 가장 감각적인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좌안이 있었기에 파리는 '사람을 사유케 하는 도시'가 되었고, 우안이 있었기에 파리는 '질서와 욕망 속에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도시'가 되었다.
중세의 끝 무렵부터 수 백 년간 로마가 '영원의 도시 로마'라고 불렸던 것처럼, 현대가 시작할 무렵에 이르러서 파리는 '영원의 도시 파리'가 된 것이다.
파리는 좌안에서의 사유와 우안에서의 욕망이, 좌안에서의 자유와 우안에서의 질서가, 좌안에서의 이상과 우안에서의 현실이, 센강의 영원한 물살을 따라 흐르면서, 때로는 악을 쓰며 서로에게 주먹질하고, 때로는 어깨 토닥거리며 서로를 북돋우는 도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좌안과 우안이 결국 우리가 내면에 가진 두 개의 얼굴, 우리의 이중성을 상징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파리를 사랑하는 것은, 파리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파리'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좌안이 상징하는 사유하고 질문하는 정신이나, 우안이 상징하는 욕망하고 표현하는 감각은, 인간 누구나가 추구하는, 병립하긴 하지만 실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결코 실현할 수 없을 수도 있는 두 개의 세상에 관한 것이다.
결국 파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서성이는 인간, 인간이기에 고뇌하고, 인간이기에 화려함을 꿈꾸는, 화려함을 꿈꾸기에 더욱 고뇌하게 되는, 바로 나의 모습이 투영된 현실에서의 물리적 개체인 것이다.
파리의 아름다움은, 현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처럼, 완벽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파리를 걸어 다니다가 보면 어딘가는 뒤떨어지고, 어딘가는 세련되고,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화합하는 모습을 발견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장 속에서 '파리의 산책자'는 스스로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파리는 파리의 산책자에게 자신의 마음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한다.
'좌안과 우안'이 우리의 마음속에 벌써부터 영토를 잡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것을 보지 못했고, 어쩌면 애써 외면해 온 것일 수 있다.
사유와 욕망은, 인간이 회피해야 할 것도,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회피해서는 안 되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자 행위이다.
고독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도시 파리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파리는, 좌안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우안의 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사람을 사유케 하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도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