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안이, 우안일 수 있도록 한 사람들
- 우안이, 우안일 수 있도록 한 사람들
관광객의 눈에는 센강이 단지 '파리를 흐르는 강' 정도로만 보이지만 조금 더 오래 머물며 센강의 다리 위에 서면, 좌안과 우안이라는 두 영혼의 일렁임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파리의 좌안은 자유와 실험, 지성을 상징하는 '생각하는 인간의 영토'이자 '사유의 영토'이고, 파리의 우안은 질서와 권력, 자본을 상징하는 '보이는 인간의 영토'이자 '물질의 영토'이다.
예술가들과 문학가들, 철학가들의 사색과 질문이 있었기에 그곳이 좌안일 수 있었던 것처럼, 우안 역시 파리를 사랑한 정치인들과 예술인들, 문학인들과 패션인들이 있었기에 단지 도시 계획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영혼의 한 축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파리의 우안 지역은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궁전, 개선문이 자리 잡은 프랑스의 정치 심장부였다.
그 심장에서 나온 권력이 파리의 우안을 설계하였고 나아가 파리를 지금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프랑스 제2제정 황제기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와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이 이끈 '파리 대개조 사업'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1873):
나폴레옹 3세는 우안의 튈르리 궁전에 거주하면서 '파리 대개조 사업'을 지시하고 이끈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1848-1852)이자 제2제정 황제기의 황제(제2제정 황제기, 1852년–1870년)였다. 중세 파리를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현대적 모습의 파리를 쌓아 올렸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금 그대로의 아름다운 파리'는 '파리 대개조 사업'의 파괴 위에 새롭게 그려진 것이다.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 남작:
나폴레옹 3세의 지시를 받아 1853년에 시작된 파리 대개조 사업을 실질적인 주역으로 파리의 파괴자 혹은 창조자라고 불린다. 오스만 남작은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세느(Seine) 도지사로 재임하며 파리를 직선 대로(Grand Boulevards), 오스만 양식(Haussmann Style), 공공녹지, 상하수도 시스템을 갖춘 이상적 도시로 완전히 재건축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 파리 예술의 중심지가 좌안의 몽파르나스로 옮겨가기 전까지 우안의 몽마르트르(Montmartre)는 여러 나라에서 건너온 예술가들의 성지였다.
몽마르트르는 지리적으로는 센강 북쪽인 '우안'에 속해 있지만, 그 성격은 우안의 전형적인 이미지(부르주아, 권력, 금융, 화려한 백화점)와는 완전히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몽마르트르의 지리적 위치와 인문학적 성격 사이에 있는 괴리는 몽마르트르를 '우안(Rive Droite) 속의 외딴섬'으로 만들었다.
19세기말 파리의 심장부가 권력과 자본, 오스만 양식의 규격화된 질서로 가득 찼을 때, 몽마르트르는 그것들이 쌓아 올린 가치에 저항하는 '우안의 거울이자 그늘'로서 '반(反) 도시적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몽마르트르가 없었다면 파리는, 단지 물질적으로만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좌안으로 화실을 옮기기 전까지 우안 몽마르트르의 화실 '바토 라부아르(Bateau-Lavoir, 세탁선)'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활하였다. 입체파의 시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의 화실이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Musée National Picasso-Paris)이 우안의 마레 지구 5 구역에 있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가장 아름다운 귀족 저택(Hôtel Particulier) 중에 하나인 '오텔 살레(Hôtel Salé, 17세기(1656~1659년) 건축)'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피카소를 '우안 화가'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 피카소가 이 저택에서 평생을 산 것도 아니고, 실제 피카소가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곳들을 따라가 보면 피카소 또한 '우안의 외딴섬'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몽마르트르(바토 라부아르): 가난했던 청년 시절에 머물며 입체파를 탄생시킨 곳이다
- 몽파르나스: '미친 시절(Les Années Folles)'에 활동하면서 전 세계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곳이다.
- 그랑 오귀스탱 거리(우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머물며 대작 <게르니카>를 그린 작업실이 있는 곳이다.
그 외에도 우안의 유흥가 피갈(Pigalle)과 물랑루주의 화가로 파리 밤 문화와 무희들의 삶을 파격적인 포스터와 그림에 담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Henri de Toulouse-Lautrec)과 우안의 상징인 오페라 가르니에를 드나들면서 발레리나들의 역동적인 몸짓과 도시의 세련된 일상을 포착한 작품들을 남긴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등이 우안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다.
좌안 작가들의 작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투영된 반면에, 우안 작가들의 작품에는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의 민낯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이 새겨져 있다.
우안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작품 <인간 희극>을 통해 우안의 금융가와 사교계, 돈과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처절한 투쟁을 사실적으로 묘사 한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와, 우안에 들어선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나 '라파예트' 같이 우안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배경으로 작품을 쓴 에밀 졸라(Émile Zola), 마레 지구의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에 거주하면서 우안의 역동적인 시민 사회와 혁명의 기운을 바탕으로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등이 있다.
방돔 광장(Place Vendôme)과 캄봉 거리를 중심으로 우안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이 되었다. 그중에는 방돔 광장의 리츠 호텔(Hotel Ritz)에 거주하면서 캄봉 거리에 첫 배장을 연 코코 샤넬(Coco Chanel)이 있다. 코코 샤넬은 우안의 화려함 속에 실용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상을 패션에 담았다. 또한 샤를 프레데리크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는 '오트 쿠튀르'(맞춤 고급 의상)의 창시자로, 우안에서 귀족과 부르주아 여성을 위한 패션 제국을 건설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법관이자 정치가였던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 1755–1826)은 우안의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레스토랑 문화를 바탕으로 미식 철학을 정립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미식 철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우안인이다.
보들레르가 우안을 걸어 다니며 도시를 탐닉하는 '거리의 산책자'라면, 브리야 사바랭은 화려한 실내에서 미식의 세계를 탐닉하는 '식탁 위의 산책자'였다.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새로운 요리의 발견이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기여한다."는 문장을 통해 그는, 인간에게 있어 미식이란, 물질적 행복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찾아가는 '인간적인 산책길'이라고 확신했다는 알 수 있다.
브리야 사바랭이 자신의 미식 철학을 담아 1825년에 출간한 <미식 예찬>(Physiologie du Goût)은 음식을 인문학적이고 과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저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음식의 이름에 남겨져 있는 그의 이름을 통해 미식에 남긴 그의 공헌이 얼마나 지대한 가를 더듬어 짐작할 수 있다.
부드럽고 풍부한 크림 맛이 일품인 '브리야 사바랭 치즈'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치즈 전문가인 부르댕이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을 기리기 위해 만든 트리플 크림치즈이다.
또한 효모 반죽을 고리 모양으로 구워 시럽에 적신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 사바랭'(Savarin) 역시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을 이름을 딴 것이다.
미식(Gastronomy)이란 무엇인가, 미식의 정의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을 단순히 '맛있는 것을 먹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오직 지성이 있는 자만이 먹는 법을 안다."라는 문장을 통해 미식을 인간만이 가진 지적 활동의 한 영역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미식은 인간이 섭취하는 모든 것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다."라는 그의 정의(definition)는 미식을 요리의 영역을 넘어 생물학과 화학, 농학과 경제학까지 아울러는 "종합 예술로서의 미식'으로 확장하였다.
존재론적 미식, 정체성의 표현으로서의 미식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브리야 사바랭의 저서 <미식 예찬>의 서문에 있는 이 문장은 '현대 음식 사회학'과 '존재론적 미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먹는 행위가 단지 생존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동물과 인간은, 먹는 행위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차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먹는 행위에 있어서도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먹는 행위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배경, 경제적 수준과 지식의 수준, 성격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표현'인 것이다.
음식에 대한 과학적 통찰
브리야 사바랭은 법관이자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생리적 효과에 대한 현대적 시각을 통해 설탕과 육즙에 대해 과학적으로 통찰하였다. 그는 비만의 주된 원인으로 '설탕'과 '밀가루'(탄수화물)의 섭취를 지목하였는데 이는 19세기 당시 선구적인 영양학적 견해였다. 또한 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성분을 '오스마좀'(Osmazome, 육즙)이라고 이름 붙였고 요리 과정에서 이것의 화학적 변화가 맛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