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 파리의 외딴섬

몽마르트르, 우안 속의 외딴섬, 우안의 '거울'이자 '그늘'


"만약 몽마르트르가 없었다면 파리의 우안은, 욕망만이 흐르는 싸늘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몽마르트르를 '파리의 외딴섬'이자 '우안(Rive Droite) 속의 외딴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안의 지리적 위치와 인문학적 위상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거대한 괴리에 사유의 통로를 잇는 인문학적 행위이다.


19세기말 파리의 정치적 경제적 심장부인 우안이 권력과 자본, 설계된 질서(소위 오스만 양식이라는)로 가득 찼을 때, 몽마르트르는 그 모든 인위적 가치에 저항하는 '반(反) 도시적 상징'이었다.

그래서 몽마르트르는 우안이긴 하지만 우안이 아닌 것 같은, 우안에 속해 있지만 좌안의 성향을 지닌, 우안 속의 외딴섬이 된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와 예술의 몽마르트르'는, 바로 이 시기에 몽마르트르에 새겨진 가치들이 입과 입을 통해, 문자와 문자를 통해 전해져 내려온 것일 뿐이라는 아쉬움을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몽마르트르: 지리적 한계가 만든 심리적 성역(Sanctuary)

도시에서의 공간이란, 거리와 길이, 지형적 높낮이를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지리적 개념이지만 몽마르트르는 '심리적 경계'를 바탕으로 '성역화'를 이룬 물질적 공간이면서 또한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파리가 몽마르트르를 품은 것은 1860년의 일이다.

파리에 편입되기 전까지 몽마르트르는 파리의 법과 질서가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적 지역'으로, 세금을 내지 않고 판매되는 술(와인)과 통제되지 않는 유흥 속에서 '경계 밖의 자유'를 만끽하는 거칠고 척박한 변두리 마을이었다.


에펠탑에 올라 내려다보는 파리는, 특히 파리의 우안은, 저 멀리 몽마르트르를 제외하고선, 돌길을 반듯하게 깔고 그 위에 돌로 지은 건물들을 빽빽하게 박아 넣은 평원 도시이다.

기복이라고 해봐야 저 멀리 지평선에 걸려 있는 몽마르트르 정도이지만 그나마도 그저 낮은 구릉이기에 '몽마르트르 언덕'이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작은 지리적 기복의 차이가 커다란 심리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평탄한 평지에 놓인 우안의 대로들은 '속도와 소통'이라는 '질주하는 수평성'을 상징하지만, 기복을 가진 몽마르트르의 언덕은 '느림과 고립'이라는 '느리게 흐르는 수직성'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상징은, 평지를 살아가는 우안의 사람들은 속도와 소통을 쫓으면서 효율적인 것에 가치를 두지만, 몽마르트르의 사람들은 느림과 고립을 받아들이면서 효율을 벗어난 것에게도 가치를 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상징은 또한 몽마르트르 스스로가 '우안이지만 우안이기를 거부한 우안'이라고 우안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안의 수평성이 권위와 불평등의 원인으로, 몽마르트르의 수직성이 자유와 평등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수평성이 평등이며, 수직성이 권위라는 보편적 공식을, 파리는 의미를 잃은 단어들의 연결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튼 우안의 평지가 만들어 낸 수평성과는 달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자연스러운 수직성은, 화려한 우안의 부르주아적 화려함으로부터 예술의 순수성을 보호하는 성벽이 되어 예술가들을 그 안으로 불어 들였고, 예술가들은 그 성벽 안에 심리적 성역을 세웠다.

이 심리적 성역이 파리 코뮌의 토대가 되었다.(몽마르트르와 파리 코뮌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으로 다룬다.)



예술적 해방구: '바토 라부아르'(세탁선, 洗濯船)와 산책자

잘 짜인 체계 속의 아카데미즘과 질서 잡힌 화려한 오페라 극장이 대표하는 우안의 예술과는 달리, 무절제와 자유 속에서 '실패와 실험'을 포용하는 것이 몽마르트르의 예술이었다.

예술적 해방구로서의 몽마르트르는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의 미학이 흐르는 영토였고 플라뇌르(산책자)의 종착지였다.


빨래 배(세탁선, Bateau-Lavoir, 바토 라부아르)의 미학:

바토 라부아르(빨래 배, 세탁선)는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있던 목조 건물로 1904년 이후 피카소를 비롯한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주택이다. 바토 라부아르라는 이름은 건물의 외관이 센강에 떠 있는 세탁선(洗濯船)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피카소와 모딜리아니가 머물었던 이 낡은 주택은 이름 그대로 '빨래 배'처럼 흔들리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품은 거처이자 수용소이며 예술적 해방구였다.

바토 라부아르에서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고 이곳에서 피카소의 입체파가 탄생하였다.

(몽마르트르의 언덕 위에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주택 바토 라부아르와 모더니즘과의 관계 및 피카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에서 다룬다.)


산책자(플라뇌르, Flâneur)의 종착지:

샤를 보들레르가 에세이 <현대 삶의 화가>(Le Peintre de la vie moderne)에서 묘사한 산책자(플라뇌르)란 단순히 길을 걷는 자가 아니라, 대도시의 복잡함 속에 몸을 던지면서도 그들과 섞이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예술가를 뜻한다.

"군중은 그의 거처다. 마치 공기가 새의 거처이고, 물이 물고기의 거처인 것처럼."

그런 '산책자'들이 거리의 화려함에 지쳤을 때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몽마르트르의 카바레였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는 우안의 부르주아들이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하류 문화에 몸을 맡기는 '카니발적 공간'이었으며 또한 몽마르트르의 젊은 산책자에게 제공되는 마지막 출구(Last Exit)였다.



몽마르트르: 우안의 '거울'이자 '그늘'

인문학적으로 몽마르트르는 우안의 거울(Mirror)이자 '그림자(Shadow)'이다.

파리의 우안이 이성과 지식, 청결과 세련미, 자본과 화려함, 직선과 질서의 영토라면 몽마르트르는 감성과 사유, 혼돈과 광기, 가난과 불결함, 무질서와 곡선의 영토였다.


또한 우안은 제약 속에서 절제된 자유의 평원이었고 몽마르트르는 제약 없는 무절제한 자유의 외딴섬이었다.

저항과 일탈을 일삼던 예술은 '외딴섬 몽마르트르'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후에야 비로소 쉬어갈 수 있었다.


몽마르트르가 거기에 없었다면, 파리는 나폴레옹 3세 황제와 오스만 남작이 만든 돌 인형으로만 남겨졌을 수 있다.

몽마르트르는 걸어서 도착할 만한 거리에서 우안을 비추는 거울이자, 우안을 화려함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그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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