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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대한 글쟁이의 사색

                       

1.

글쟁이의 글쓰기란 것이, 그것이 운문이든 산문이든, 일상생활의 생필품 같이 원래 그곳에 있었고, 늘 그냥 있어 온 것 같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있는 참으로 형이상학적이고 경이로운 행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글을 쓰는 행위는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언어에 대한 이해는 글쟁이가 되기 위한 첫 번째의 걸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란 것을 과장을 버무려 얘기하자면 '인간의 사고가 만들어 가는 실존하긴 하지만 잡히질 않는 초물질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제대로 쓰는 것은 그 초물질을 다루는 초인적인 행위의 일종이 되는 것이다. 결국 언어는 현실의 영역에서 실체하고 있는 것이지만 형이상학의 영역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초이성적인 무엇이라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연이라는 거대한 영역의 범위에서 보게 되면, 언어는 인간이라는 개체에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자연의 다른 어느 개체에서도 존재할 수 없는,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있는 어떠한 것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게 되면 언어는, 인간이라는 개체와 다른 개체를 구분 짓게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언어 자체와 언어의 구성, 언어가 이루는 문장의 구조와 이것의 분석, 문장과 단어의 인식 방법, 언어의 탄생과 진화와 같이 언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에 대해 연구와 강의를 해왔다. 그것은 나의 관심 분야 중에 인공언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언어학이라는 순수 학문적 관점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언어학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언어를 활용하고 분석하는 학자로서 언어란 무엇이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석하고 인지하게 되는지에 관한 각종 연구 자료들과 읽을거리들은, 연구실의 책상머리에 놓여있던 관심사였다.          



2.

언어에 대해 얘길 하자면 그 범위가 너무 넓을 수 있어 여기에서는 언어의 유형을 중심에 두고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언어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탄생과 진화의 과정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해온 '자연언어(Natural Language)'이고, 또 다른 하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에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언어’라 할 수 있는 '인공언어(Artificial Language)'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연언어나 인공언어라는 표현은 학자에 따라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도 있지만,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실질적인 의미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너무나도 뻔해 보이는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언어의 유형을 크게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자니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넘어 의구심마저 든다. 그러한 감정의 발로를 굳이 막아서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새로운 것을 접하게 되면, 인간이기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럴 때면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 좋다.      

글쟁이의 감상과 신성이라는 비물질적을 언어에 더해 넣자 ‘신과의 소통에 사용되었던 언어’라는, 태초의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었지만 언제인가부터 인간이 잃어버렸던, 또는 망각해 버렸던 언어가 손끝에서 더듬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신과 소통할 수 있었을까. 그때 사용했던 언어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사용되었던 언어는 어쩌면 온전한 신의 언어였을 수 있고, 일부분만이 신의 언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온전한 신의 언어를 인간이 사용했었다면, 인간끼리가 그러하듯 인간은 신과도, 아무런 제약 없는 자유로운 의사와 사상의 소통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만약 일부분에서만 신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라면 인간은 허락된 부분에 있어서만 신과의 소통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 허락은 신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형태이었건 간에, 적어도 인간이 그때의 언어를 놓쳐버리기 전까지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신과의 소통이 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귀에는 왜 더 이상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지금은 왜 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궁금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축복이자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이다. 기록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시간을 너머 선 아주 오래 전의 기록들 속에서, 선지자라고 불릴만한 오직 선택받은 이들이 신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는, 신의 말씀을 들었다는 믿을만한 기록을 더 이상은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왜 그럴까. 어떤 일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 있었던 것일까. 인간이 살아가야만 하는 이 땅에는 더 이상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 어떤 사유로 인해 신이 이 땅을 떠나 버리게 된 것일까. 창조주가 이 땅을 버렸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한낱 불온한 허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을 버린 것일까.


답안지가 주어져 있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답안지가 없었다고 여기면서 답이라 믿으면 되는 여러 개의 답 비슷한 것들, 답 같은 답을 찾아낼 때까지는 답을 대체하는 법이다. 그러니 누구나 답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답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하나의 답 비슷한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의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은, 신의 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왜 신의 언어를 잊어버리게 된 것일까. 답일 것도 같고 답이 아닐 것도 같은 답은 항상 우리에서 찾아진다.

아는 것과 알게 된 것이 많아진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스스로가 향상했고, 그에 따라 그전까지는 신에게 기대 왔던 각종 물음들을 스스로가 풀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인간은 점차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신과의 소통을 줄여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를 소통시켜주던 언어는 점차 잊혀 갔고 결국에는 신 또한 그 언어를 회수해 가버렸으니, 누군들 더 이상은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무언가를 잃어야만 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이다. 새로운 하나를 얻으려면 손에 든 것 몇 개는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것을 인간은 미처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을 수도 있다.

생각해봐야 하겠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혹시 되돌릴 수는 없을지.      


by 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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