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편) 현대적 파리의 설계자 나폴레옹 3세

현대적 파리의 설계자 나폴레옹 3세 -생애 편


'파리 대개조'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사람은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 4월 20일 - 1873년 1월 9일)였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Napoléon Ier)로 잘 알려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의 조카이다.


파리 대개조 사업(1853-1870, Renovation of Paris)은 나폴레옹 3세가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바로 다음 해인 1853년부터, 보불 전쟁(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의 패배로 실각한 1870년까지, 약 17년간 총력을 기울여 집중했던 초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나폴레옹 3세의 머리와 가슴에서 나왔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있게 한 '현대적 파리의 설계자'로서 '현대적 파리의 설립자'(founder of Modern Paris)라고 할 수 있다.

"파리를 향한 지식의 걸음은 언젠가 결국에는 나폴레옹 3세의 흔적을 더듬기 마련이다."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1853년(45세), painted by Franz Xaver Winterhalter)



나폴레옹 3세는 어떤 인물인가


탄생과 성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신화와 정치적 꿈(1808-1848)

본명은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인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 4월 20일 - 1873년 1월 9일)는 1808년 4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의 넷째 남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의 아들이다.

/*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의 아버지이자 나폴레옹 1세의 남동생

나폴레옹 1세는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를 자신이 정복한 네덜란드의 국왕으로 앉혔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단순히 명목상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네덜란드의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자신을 왕위에 앉힌 형 나폴레옹 1세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Holland)을 위해 헌신하였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로데베이크 1세(Lodewijk I)라는 이름으로 1806년부터 1810년까지 약 4년간 통치하면서 진심으로 네덜란드 국민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명령보다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자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보내 네덜란드를 압박하였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아들(훗날의 나폴레옹 3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언을 하고 퇴위했으나, 나폴레옹 1세는 네덜란드를 프랑스 제국에 강제 병합시켰다.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는 오스트리아 등으로 망명을 떠났다. */


나폴레옹 3세의 어머니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Hortense de Beauharnais)는 나폴레옹 1세의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Joséphine)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즉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이었고, 그 딸이 나폴레옹의 넷째 남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인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동시에 '의붓손자'로서 태생적으로 보나파르트 가문의 적통을 잇는 친조카라는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나폴레옹 1세의 직계 후계자는 오스트리아 공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나폴레옹 2세(로마왕)였지만 나폴레옹 2세가 21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신화를 이어받을 유일한 적통으로 나폴레옹 3세가 부각되었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의붓 손자이자 친조카로서 나폴레옹 1세를 잇는 '정신적 아들'이라는 다중적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프랑스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나폴레옹 1세의 신화를 동경하던 19세기의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의 이러한 혈통적 배경은 그의 운명이자 정치적 자산이었기에 나폴레옹 1세를 정치적 야망 품은 청년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대부분은 혁명가로써 몇 차례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여 망명객으로 떠돌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런던과 같은 현대화된 도시를 경험하며 '현대화된 파리', '새로운 파리'에 대한 구상을 머리와 가슴에 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파리 대개조 사업의 구상은, 이와 같이 나폴레옹 3세가 겪었던 청년기의 실패 위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기: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1848-1852)

1848년 '2월 혁명'으로 프랑스 대혁명(1789년) 이후 복고된 왕정이 무너진 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주는 향수를 바탕으로 '질서와 번영'이라는 약속을 내걸고 선거에 나섰다.

그 결과 1848년 12월,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를 통해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헌법상 단임제에 묶여 재선이 불가능해지자, 임기 종료를 앞둔 1851년 12월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권을 장악하면서 프랑스를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변화시키는 길을 닦았다.


/*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은 절대 왕정의 상징인 루이 16세를 처형하면서 왕정과 봉건 제도를 무너뜨리고 제1공화국 수립함으로써 근대 시민 사회의 문을 연 모든 시민 혁명의 원형이다.

약 59년 후인 1848년에 일어난 프랑스 2월 혁명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복고된 왕정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리프를 폐위시키고 왕정을 영원히 폐지하면서 제2공화국을 수립한 시민 혁명이다.

2월 혁명이 일어난 해인 1848년 12월에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시행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월 혁명은 노동자와 서민들이 투표권을 요구하며 일어난 혁명으로, 유럽 전역에 민주주의 열풍을 일으킨 '민족의 봄'이라 불리는 혁명이다. */


황제기: 제2제국의 번영과 파리 대개조(1852-1870)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독재권을 장악한 1주년이자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기념일이었던 1852년 12월 2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 나폴레옹 3세로 공식적으로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1870년 9월까지 약 18년간의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국) 시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진행된 파리 대개조 사업(1853-1870)은 파리를 중세의 어두운 파리에서 벗어나 지금과 같은 현대적 파리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파리 대개조 사업이 시행된 기간과 나폴레옹 3세 황제의 재위기간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파리에 대한 나폴레옹 3세의 사랑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몰락과 사망: 제국의 종말과 망명(1870-1873)

영원할 것 같던 프랑스 제국은 1870년 프로이센과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한 순간 허망하게 무너졌다.

나폴레옹 3세는 '세당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의 포로로 잡혀 그해 9월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였고 이로서 프랑스 제국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1871년의 '파리 코뮌'의 비극과 새로운 공화정의 수립을 타국 멀리에서 지켜보다가 65세가 되기 약 3개월 전인 1873년 1월 9일 영국의 켄트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 파리 코민(1871년 3월 18일 - 1871년 5월 28일)과 72일간의 꿈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871)은 보불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항복에 분노한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노동자 민주주의 자치 정부이다.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생포되고 파리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굶주림에 허덕이자, 파리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거기에다가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독일에 거액의 배상금을 약속하면서 시민군(국민방위군)의 급료를 끊으려 하자, 이에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이 사수한 대포를 지키기 위해 봉기했다.(시민군의 '대포 사수' 사건에 대해서는 몽마르트르의 사크레퀴르 대성당에 대한 설명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시민들은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스스로 '코뮌'(Commune, 프랑스어로 '공동체' 또는 '자치 단체'**를 뜻하는 단어)을 선포하면서 정교분리(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 노동권 보호(야간작업 폐지 및 노동자 협동조합 운영), 여성 참정권 논의(여성 동맹의 활발한 활동과 교육 개혁), 국제주의(민족주의를 넘어선 만인의 평등 지향)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프랑스 임시정부(베르사유 정부)는 프로이센군(독일군)의 묵인 아래 무력으로 파리를 진압하려 했다.

1871년 5월 21일부터 일주일간 파리 시내에서 임시정부군과 코민 시민군 간에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고(이를 '피의 일주일'이라고 부른다.) 코뮌 측은 저항의 의미로 튈르리 궁전 등 제정의 상징물에 불을 질렀다.(이를 '파리의 불꽃'이라고 부른다.)


임시 정부는 파리 시민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자행하면서 코민 혁명을 진압하였다.

약 2만여 명 이상의 파리 시민이 즉결 처형되었고, 마지막 항전지인 페르 라셰즈 묘지의 '연맹병의 벽'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1871년 3월 18일에서 같은 해의 5월 28일까지 파리 시민이 꾼 72일간의 꿈은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파리 코민의 비극은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거대한 영감이 되었고 파리 시민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상징주의초현실주의를 뚫어서 현대시에도 영향력을 파급하고 있는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년 10월 20일 – 1891년 11월 10일)는 코뮌(1871년 3월 18일 - 1871년 5월 28일)의 열기와 비극, 절망을 목격하며 기존의 질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시를 썼고, 19세기 프랑스 회화에서 사실주의 운동을 이끈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Jean Désiré Gustave Courbet, 1819년 6월 10일 – 1877년 12월 31일)는 코뮌에 적극 가담했다가 나폴레옹의 전승 기념주(방돔 기둥)를 파괴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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