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는 왜, 파리 대개조를 꿈꾸었나

나폴레옹 3세라는 한 남자의 집착이 빚어낸 미학적 연극

나폴레옹 3세는 왜, 파리 대개조를 꿈꾸었나

- 나폴레옹 3세라는 한 남자의 집착이 빚어낸 미학적 연극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을 거쳐,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로 취임한 것은 1852년 12월 2일이고, 파리 대개조 사업이 닻을 올린 것은 1853년 6월 22일(공식적으로는)이다.

이와 같이 파리 대개조 사업은,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취임하고서는 불과 몇 달 후에 시작된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이기에 대부분의 문헌들에서는 파리 대개조 사업의 시작을 두고 '황제로 즉위한 직후' 또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파리 대개조 사업이 시작된 것은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독재적 권력을 획득하고 난 후이지만, 사업의 규모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나폴레옹 3세가 "파리를 완전히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황제가 되기 오래전'부터라고 봐야 한다.


나폴레옹 3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파리에 '직선을 기반으로 질서의 미학'을 부여한 것은 결코 우발적인 생각이나 행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현대적 파리의 청사진은 1853년 사업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있었던 런던 망명 생활에서 그가 보고 겪었던 문화적 충격과, 황제로 즉위한 후 권력에 대한 냉철한 계산을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런던 망명 시절의 현대적 도시에 대한 문화적 충격(1830년대-1840년대)

나폴레옹 3세는 청년 시절 프랑스에서 추방 당해 영국의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런던은 산업혁명의 정점에서 땅속으로 매립한 하수도와 곧게 깔린 도로, 하이드 파크와 같은 도심 공원을 갖춘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는 여전히 땅 위로 오물이 흐르고 어둡고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깔린 중세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런던의 쾌적함과 효율성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또한 두 발로 직접 체험한 나폴레옹 3세는 "왜 나의 조국 프랑스 파리는 저런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도시 계획을 통한 파리 대개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파리를 런던보다 더 위대한 도시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혁명의 바리케이드에 대한 대비와 도시 통제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가문의 후예로서 잘 잡힌 질서와 잘 갖추어진 체계를 중시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이 들끓던 시기였고 파리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혁명가들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정부군에 대항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1830년 7월 혁명 당시에 파리의 골목은 혁명가들을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가 되어 혁명의 진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기 전부터 "파리를 지배하려면 먼저 충분히 넓고 반듯한 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면에서 긴 직선 도로를 뚫는 것은 단지 '미학적인 선택'이 아니라, 대규모 정규군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고, 대포와 총을 효율적으로 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파리 시민의 일상을 권력의 시야 아래 두려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적 황제'로서의 야망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를 민중의 편에 선 군주로 남겨지길 원했고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포장하려 노력했다. 그는 망명 시절 <빈곤의 근절>이란 책을 집필했을 정도로 도시 빈민의 삶과 위생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파리는 아직 중세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에 아주 취약한 불결하기 짝이 없는 도시였다.

그는 파리를 현대적인 모습으로 개조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잘 닦인 길과 위생적인 상하수관 같은 사회적 인프라를 통해 깨끗한 물과 공기를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황제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다.

이런 측면에서 파리 대개조 사업은 나폴레옹 3세 스스로가 '사회주의적 황제'임을 증명하려는 거대한 선전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신화의 집대성으로서 자기 증명을 위한 새로운 파리의 건설

나폴레옹 3세의 재임 기간(1852-1870)은 시인이자 비평가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년 4월 9일 - 1867년 8월 31일)의 우울이 깊어지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나폴레옹 3세는 직선의 조화 위에서 완벽한 질서를 갖춘 파리를 건설하려는 원대한 꿈을 꾸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든 그 반듯한 길 위에서 훗날 예술가들은 기존의 질서를 깨부수는 입체주의를 탄생시켰고 재즈의 엇박자를 연주하였다.

황제라는 가장 보수적인 위상을 기반으로 파리를 가장 진보적으로 바꾼 그의 이중성은, '우안 부르주아들의 이중성'과 새로운 파리라는 진보적인 꿈을 향한 '찬란한 모순'을 설명하는 훌륭한 서사적 장치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의 원대한 야망과 어머니(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의 예술적 감수성을 동시에 물려받은 보나파르트 가문 신화의 집대성이었다. 그가 파리의 골목을 허물고 직선의 길을 낸 것은, 단순히 도시를 정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화의 시조인 나폴레옹 1세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제국'을 세우려는 처절한 자기 증명이었다."


민본주의적 독재 위에 세운 새로운 파리

나폴레옹 3세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는 네덜란드 왕국의 국왕 로데베이크 1세(Lodewijk I)로서 형인 나폴레옹 1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왕이 되길 바랐다.

국왕으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통치는 비록 4년이란 짧은 기간에 끝났지만, 루이 보나파르트의 '민중의 삶에 개입하려는 의지'는 아들인 나폴레옹 3세가 파리의 골목을 허물고 하수도를 정비하며 '위생과 질서가 잡힌 제국'을 건설하려는 뿌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폴레옹 3세에게 파리는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의 영광을 재현할 무대이자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가 실패했던 '사랑받는 군주'의 꿈을 완성할 시험장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가 네덜란드의 국왕으로서 보여준 '민본주의적 독재'의 속성은 나폴레옹 3세가 파리 대개조를 추진하며 노동자 주택을 짓거나 공원을 조성했던 유화 정책들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3세라는 한 남자의 집착이 빚어낸 미학적 연극

나폴레옹 3세가 가슴으로 그려낸 파리의 직선은 젊은 시절에 걸어 다니던 런던의 안갯속에서 싹텄고, 혁명의 불길에 대한 공포 속에서 그 기초를 다졌다.

파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다듬으려는 '조각가의 욕망'과 닮아 있다.

그가 파리 대개조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품었던 결핍과 공포가 결국 훗날 보들레르가 한탄하고 랭보가 비난하고 샤넬이 쫓아다녔던 차가운 돌길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파리 대개조 사업은 단순한 직선의 배열이나, 돌을 깔아 길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쌓아 올리는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나폴레옹 3세라는 한 남자의 집착이 빚어낸 미학적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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