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개조 사업의 진정한 승자 오스만 남작

파리 대개조 사업의 진정한 승자 오스만 남작


<파리 대개조 사업>은 수 십만 명의 파리 시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는 대규모 프로젝트였기에 그 스케일만큼이나 엄청난 비난과 리스크가 따르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정치인으로서 나폴레옹 3세는 오랜 망명 생활을 견뎠고 기회를 잡아 대통령이 된 뒤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아주 영리한 인물이다.

물론 나폴레옹 1세의 조카라는 태생적 후광을 등에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나폴레옹 3세를 평가하는 것은 '작은 지식을 전체라고 일반화'하려는 '지식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된다.


이 프로젝트는 강제 철거와 유서 깊은 유적들의 훼손, 소음과 먼지 같은 각종 문제들을 일으킬 것이고 파리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민원과 분쟁, 이에 더해질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는 이런 복잡하고 민감한 이슈들을 감수하면서 사업을 진행할 강력한 추진력과 탁월한 업무 능력을 겸비한 '검증된 실무 집행자'가 필요했고 그 자리에 발탁된 것이 바로 오스만 남작이다.


오스만은 나폴레옹 3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파리 대개조 사업>을 실무적으로 집행한 강단 있는 행정가였다. 만약 오스만이 아니었다면 파리는,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을 발탁하지 않았더라면 파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가 아니라 중세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파리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해, 여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럽의 몇몇 도시들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말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교의 기준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그들 도시가 중세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변화를 거부'하는 '소도시 특유의 느림'과 '소도시 특유의 완고함'이 방패막이로 작용한 덕분이다. 파리와 같은 '정치와 경제의 중심'으로서 메트로폴리탄을 그들 중세 도시들과 비교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파리와 런던, 뉴욕과 같은 메트로폴리탄들이 느림과 완고함 속에서 자라난 곳인지를 따져 본다면 이것에 대한 이성적 분별력을 갖게 될 것이다.

오스만을 두고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희생양' 또는 '정치적 방패'였다고 말하는 문헌들이 있는데, 남작의 성격과 행적을 뜯어 놓고 살펴보면, 남작은 자신이 파리를 재탄생시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사업 자체를 즐긴 면이 있어, 남작을 두고 '희생양'이었다든가 '방패'였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파리를 사랑한 것인지, 대개조 사업 자체를 사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하나 만을 딱 집어 그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파리를 대개조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오스만은 실무 집행자로서 '파리 대개조 사업의 주역'인 것이다.


어쨌든 1853에 시작된 사업이 17년째가 되던 해인 1870년, 재정적 스캔들과 들끓는 민심으로 인해 정치적 압박이 심해지자 황제는 오스만을 자리에서 해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사업의 마무리 수순에서 택한 출구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스만 또한 황제만큼이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임 전과 해임 후에도 강력한 '자기 브랜딩'을 통해 '오스만과 파리 대개조 사업'을 동일시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해임된 후에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Mémoires)>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에 자신이 어떻게 파리를 설계하였고 어떻게 그것을 집행했는지, 그 과정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오스만이 이 저서를 쓴 것은, 회고록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공적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파리 대개조 사업'에서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오스만은 자신이 파리 대개조 사업의 실무 집행자란 사실을 넘어 자신이 사업의 주역이며 '파리 대개조 사업 그 자체'라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오스만의 이 저서는 파리 대개조 사업의 역사에서부터 에피소드, 실무적인 내용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최고의 '파리 대개조 사업 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후대의 사학자들은 오스만의 기록을 토대로 파리 대개조 사업을 연구하면서 오스만 남작은 사업의 주역으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 3세의 파리 대개조 사업은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 또는 '오스만의 작업(계획)'(Travaux Haussmanniens)이란 이름의 고유명사로 정착하였다. 명칭만을 놓고 본다면 파리 대개조 사업의 진정한 승자는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아니라 오스만 남작인 것이다.


오스만양식(Haussmannian)

나폴레옹 3세는 현대화된 파리를 꿈꾸며 대개조 사업을 '구상'하였고 오스만은 그 구상을 '질서를 기반으로 통일화된 규격'으로 만들어 실행으로 옮겼다. 현대적 파리의 규격화된 질서와 통일된 미학은 나폴레옹 3세의 야망에서 시작해서 오스만의 실무적 디테일에서 탄생한 것이다.

오스만은 건물의 높이, 외벽의 재질, 가로등의 모양, 벤치의 디자인까지, 새롭게 탄생하는 파리의 모든 것에게 '오스만 양식(Haussmannian)'이라는 미학적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현대 도시 계획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파리 대개조 사업이 학술적으로 연구되면서, '오스만 양식'이라는 용어가 하나의 이론적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

황제가 꿈꾼 현대적 파리의 미학은 오스만이라는 실무자의 머리와 손을 거치면서 물리적 실체가 되었다. 역사가 이 사업에서 황제의 이름을 지우고 오스만을 선택한 것은, 파리의 미학이 권력자의 야망에서 탄생했다고 인정하기보다는 한 천재의 광기가 낳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나폴레옹 3세의 권력'이 낳은 차가운 결과물이 아니라, '광기 어린 천재 예술가 오스만'이 빚어낸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서의 파리가 되어 '예술의 도시라는 아이덴티티'를 지켜갈 수 있기에, 인간이란 원래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존재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로서 오스만은 지방 관료에서 센 강 지사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광기 어린 실무 행정가가 아니라 현대적 파리를 빚어낸 광기 어린 천재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예술가의 광기가 천재적 예술품을 탄생시켰을 때는 그것을 탓하지는 않는다. 결국 '권력자 나폴레옹 3세와 실무 집행자 오스만 남작' 사이에 흘렀던 팽팽한 긴장감은 오스만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로서 파리 대개조 사업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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