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개조 사업의 실질적 설계자이자 임명권자는 프랑스 제2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3세이다.
따라서 이 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파리 대개조 사업'(Napoleon III's Renovation of Paris)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업에 얽혀 있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과 정치적 이유로 인해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Haussmann's Renovation of Paris) 또는 '오스만의 작업(계획)'(Travaux Haussmanniens)과 같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은 완전히 새로운 파리를 건설하라는 지상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한 '현대적 파리의 창조자'들이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파리의 파괴자'라는 비난은, 모든 위대한 일에 뒤따르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해서, 그 크기만큼이나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하나의 반증이라고 여기면 된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의 만남은, 자신들에게도 운명적인 사건이었지만 파리에게도,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왕이자 나폴레옹 1세의 남동생인 [루이 보나파르트](로데베이크 1세(Lodewijk I))의 아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 황제가 되었고, 오스만이라는 충실한 실무 집행자를 만나 [파리 대개조]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시켰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파리'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을 거쳐 황제로 즉위한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당시 지르공드(Gironde) 주의 주지사였던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1853년의 만남은, 현대적 파리를 탄생시킨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임명권자인 나폴레옹 3세가 실무 집행자인 오스만 남작을 임명한 인사 발령으로서의 행위를 넘어, 끓어오르는 야망을 가진 기획자 나폴레옹 3세와, 광기로 여겨질 만큼이나 열정적인 실무자 오스만이 만남으로써, 각자의 퍼즐을 완성시킨 역사적 결과로 이어졌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런던 망명 시절에 보고 느꼈던 잘 닦인 도로와 잘 정리된 상하수도 시스템, 잘 조성된 도심 공원 같은 현대적 도시 인프라를 '파리화된 파리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행정 시스템과, 천문학적인 예산이 따르는 대규모 공사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그를 막아섰다. 사업을 추진하기 위에서 나폴레옹 3세는 시민들의 원성과, 정치적 걸림돌을 전략적으로 회피하거나 적절하게 무시하면서 '파괴를 통한 재창조'를 이루어낼 만큼 강단 있는 인물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가 발굴한 사람이 바로 오스만 남작이다.
오스만을 나폴레옹 3세에게 추천한 사람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빅토르 드 페르시니(Victor de Persigny)이다. 그는 나폴레옹 3세에게 오스만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은 괴물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키가 크고 힘이 넘치며, 일을 할 때는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용감합니다. 무엇보다 오스만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것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오스만은 몇몇 지방의 관료(지롱드(Gironde) 주의 주지사 등)로 지내면서 도로 정비, 상하수도 시스템 정비와 같은 여러 인프라 사업과, 행정 처리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업무의 수행에 있어 조직의 상부와 상관이 지시하는 것을 군대식으로 따르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파리 대개조'라는 나폴레옹 3세의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준비된 실무 집행자였던 것이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을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으로 불렀다. 이 첫 만남에서 황제는 책상 위에 커다란 파리 지도를 펼쳤다.
사실 이 날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날이 아니다. 하지만 '파리 대개조 사업'을 위한 만남으로는 이때가 첫 만남이기에 많은 문헌들이 이것을 '두 사람의 첫 만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날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다는 표현에는 '파리 대개조 사업'을 극적으로 부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날 오스만은 황제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선명하게 그어 놓은 세 개의 선을 볼 수 있었다. 그 선들은 나폴레옹 3세가 색연필로 직접 그은 것이었고, 지도는 파리를 남북과 동서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직선 도로의 설계도였다.
황제는 '파리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고 싶은 원대한 구상'에 대해 말하였고, 이를 위해 온갖 비난과 각종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사업을 실행할 만한 능력 있고 강단 있는 실무 책임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황제는 오스만이 행정 능력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업무 추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약 1년 전인 185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나폴레옹 3세는 민심을 파악하는 차원에서 지롱드 주의 주도 보르도(Bordeaux)를 들렀고 오스만은 그 주의 주지사로서 나폴레옹 3세를 영접하였었다.
사실 나폴레옹 3세가 보르도에 간 것에는 오스만이 주지사로서 실행한 '도시 인프라 개선 사업'을 살펴보려는 것에도 목적이 있었다. 보르도에서 나폴레옹 3세는 도로 확충, 상하수도 개선 작업과 같은 오스만식 도시 개선 사업의 결과물들을 살펴보면서 '오스만이란 인물'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오스만은 황제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알아차렸고 일말의 주저 없이, 자신이 황제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이에 황제는 그 자리에서 오스만을 센 강 지사(Préfet de la Seine)로 임명하였다. 이로서 파리 대개조 사업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날 오스만에게 내려진 직책을 두고 '파리 지사'라고 기술하는 문헌들이 있는데, 당시 파리는 센 강 지사가 관할하는 중심 구역이었기에 파리 지사가 아니라 '센 강 지사'(Préfet de la Seine)가 맞는 명칭이다.
결국 그 자리에서 오스만은 파리를 포함한 센 강 유역을 관할하는 관료로서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프랑스 정치 심장부에 화려하게 입성하였다. 훗날 오스만은 그날의 일에 대해 회고록에서 '나의 인생이 파리라는 거대한 유기체와 결합된 결정적 순간'이라고 술회하였다.
"1853년, 튈르리 궁전의 집무실에서 나폴레옹 3세가 그은 세 줄의 색연필 선은 현대적 파리라는 모더니즘이 시작되는 출발 신호였다. 황제는 꿈(Dream)과 이상(Ideal)이라는 밑그림을 그렸고, 오스만은 황제의 밑그림 위에 실행(Execution, Take action)과 성취(Fulfillment)라는 색을 입혔다. 황제는 '세계의 수도로서 파리의 영광'을, 오스만은 '직선의 질서 위에 재영토화된 파리'를 꿈꾸었다. 이날 그들이 잡은 손은 지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중세 파리에게 내린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매혹적인 파리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