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에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인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연갈색 말간 커피 한 잔에 백목련과 자목련의 사랑이야기를 한 스푼씩 녹여 넣고 봄 볕 아래 앉는다.
겨울을 털어낸 햇살이 갓 돋아난 연초록 나무 잎사귀에게 찰랑찰랑 농을 건다.
전언이랄까, 무언가 나지막한 얘기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이윽고 하얀 종이 잔 표면에 자잘한 진동이 일어난다.
이럴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조심스레 귀를 열어야 한다.
//
옛날 옛적에 하늘나라 공주가 바닷가 땅에 사는 바다지기를 사랑했었데.
문제는 외사랑에 빠진 공주가 하늘나라를 떠나 바다지기를 찾아갔지만 바다지기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다는 거였어.
실망한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버렸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다지기는 자신의 아내를 해쳤다고 해.
알아 이 이야기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여러 입을 통해 전해져 온 전설일 뿐이라서 그저 그럴려니 하면 되지 귀를 세워가며 들을 필요는 없어.
원래 전설이란 것에는 과장이나 각색이 듬뿍 토핑 되어 있는 데다가 막장적 요소까지 더해지기 십상이거든.
그래서 내 생각에는 말이야, 태초에 인간은 막장 속에서 태어난 것 같아.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게 되었고, 막장이 있으라 하니 막장이 있게 된 걸 거야.
틀림없어, 그래야 세상살이가 지루해지지 않을 테니.
아무튼 집 나간 딸을 찾던 하늘나라 왕이 늦게서야 이 두 여자의 비극적인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해.
아마 여기쯤에서 공주의 아비인 하늘나라 왕을 등장시킨 것은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누군가의 의도가 끼어들었을 거야.
어쨌든 좋아. 하늘나라의 왕은 자신의 딸인 공주를 백목련으로, 바다지기의 아내였던 여자를 자목련으로 피어나게 했다고 해.
그래서 목련꽃이 바다지기를 향해 피어난다고 하는데 그게 북쪽이래.
글쎄, 이 말의 진위는 정확히 모르겠어.
지금껏 내가 만나본 목련들은 봄햇살과 봄바람을 따라 방향 없이 피어나기만 하던걸.
아, 자꾸 얘기에 사족을 달지 말라고?
미안해 하지만 이게 글쟁이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해 줘.
사실 이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아. 이게 전부야.
근데 말이야, 너 혹시 궁금한 거 없니.
난 처음 이 이야기를 듣던 순간부터 따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지만 우선 몇 가지만은 얘기해야겠어.
전설이니깐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어차피 이것저것 다양한 요소들이 끼어들어 가며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전설의 속성인데, 한 두 마디 덧붙인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일 있겠어.
먼저 왜 백목련의 개화 시기에 대해 좀 따져 볼 필요가 있어.
내 생각에는 말이야, 하늘나라 공주의 성질머리가 워낙 급해서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이자 이른 봄날에 서둘러 혼자서만 피어난다는 거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내놈을 찾아 하늘나라를 뛰쳐나간 짓이나, 그 사내가 이미 결혼했다고 제 성질 못 이겨 훌쩍 바다에 뛰어든 꼴을 보면 하늘나라 공주는 틀림없이 한 성질 했을 것 같아.
아, 그 아비의 심정이 어땠을지, 나 또한 아비이다 보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져.
백목련이 자목련보다 먼저 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화사한 목련꽃으로 피어나게 한 것은 분명 하늘나라 왕이 공주에게 준 선물인 것이 분명해.
또한 꽃이 피는 시기를 보면 백목련이 자목련보다 먼저 피어나는 것은, 백목련이 바다지기 사내의 눈길을 먼저 받게 하려는 의도였을 거야.
공주의 아비는 선점 효과라는 경제 용어에 대해 틀림없이 이해하고 있었을 거야.
또한 그 색을 보면 백목련은 안 밖이 모두 화사한 진주 빛 하얀색이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몇 조각되지 않는 여린 봄볕만으로도 투명한 아름다움을 맘껏 뽐낼 수 있지만, 자목련의 상황은 전혀 달라.
자신의 화사함을 안으로 가리고 짙은 보라색이 피부며 얼굴을 덮고 있기에 때론 "다소 검은 적목련"이나 그냥 적목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
사실 약간 흐린 날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아래 덩그렇게 달려 있는 자목련 덩이가 보라색인지 검붉은 색인지 헷갈리기도 해.
암튼 자색의 자태가 곱긴 하지만 백목련의 화사함에 넋을 잃고 있을 바다지기 사내의 눈길을 생각하면, 자목련의 슬픔이 지울 수 없는 천형처럼 보여.
혹시 공주의 아비나 공주 자신이 아직도 그 슬픔을 즐기고 있다면, 그들의 잔인함이 백목련의 말간 웃음 속에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말이야 난, 백목련을 잔인한 봄의 꽃이라고 부르고 싶어.
백목련과 자목련의 기막히고 슬픈 사연이 어찌 되었건, 결국 사랑은 한 곳을 바라보는 건가 봐.
바다지가를 향한 두 여자의 끝없는 사랑처럼,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오직 그 사람만을 바라는 끝없는 갈증에 인생 전체를 걸어도 행복해지는 것, 그래서 이성의 잣대로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몽환 같은 것이 사랑인가 봐.
그래서 말이야, 인생이란 건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오늘이 최고의 날인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