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개월 20일
왜 나한테만 그럴까. 주아에게 자주 하는 생각이다. 엄마와 아빠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 엄마한테는 대답도 잘하고 산책할 때도 잘 걷고 마트 가면 장난감도 고르지 않고 놀 때 짜증도 안 낸다. 그런데 왜 왜 왜 나랑 있을 땐 다른 애가 될까.
아빠랑 있을 땐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하고 산책할 땐 몇 걸음 걷지도 않았으면서 안아달라 그러고 마트 가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고 놀 땐 짜증을 왜 이리 많이 내는지.
한 번은 이런 일 있었다. 공원에서 잘 놀고 집에 가는 길, 주아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낮은 오르막 길을 나오자 주아가 목마를 태워달라고 했다. 가파른 언덕도 아니고 잔디밭 길 언덕이라 힘든 길이 아닌데 목마를 태워달라니... 주아에게 말했다.
“목마는 조금만 걷고 해 줄게. 저기 위까지 걷고 나서 해줄게.”
주아는 지금 해달라며 떼를 썼다. 나는 지금은 해줄 수 없다며 언덕 위 까지 가면 해준다고 말해주고 먼저 걸었다. 그러자 큰소리로 울면서 쫓아온다. 멈추면 다시 목마를 해달라고 울면서 크게 말한다. 나는 지금은 안된다고 저기까지 가면 해준다고 다시 일러주었다. 그러자 바닥에 앉아 울면서 지금 해달라고 또 떼를 쓴다. 허리를 숙여 주아를 마주 보며 지금은 해줄 수 없다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목마는 지금 해줄 수 없으며 저 위에서 해주겠다고. 주아는 바닥에 앉아 다리를 구르며 운다. 소리를 지르며 운다. 그런 주아를 가만히 바라본다.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 시작된다.
한 대 쥐어박을까 화가 나기도 하고, 그냥 혼자 두고 먼저 갈까 냉정한 생각도 들고, 이렇게 까지 울릴 필요가 있었나 싶은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냥 목마 태워줄 걸 그랬나 후회도 들고, 목마를 태워주면 앞으로도 계속 떼를 쓸 거니까 이 참에 버릇을 고쳐야지 하며 다짐도 하고…
“그렇게 울고 떼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울음을 멈추면 이야기할 거야.”
주아에게 한마디 하고 옆에 앉았다. 주아가 울음과 짜증은 더 커졌다. 기다렸다. 그리고 같은 말을 한번 더 했다. 떼가 멈추지 않아 같은 말을 또 했다. 그러기를 10여분. 주아의 울음소리는 작아졌다. 나를 힐끗힐끗 본다.
“주아야, 이제 아빠가 이야기해도 돼?”
주아는 다가왔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물과 땀을 닦아주고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목마 타고 싶었어?”
주아가 얼굴을 끄덕인다.
“그랬구나. 근데 아빠가 이야기했잖아. 저기까지 같이 걷고 목마 해준다고. 근데 주아는 걷으려 하지도 않고 바로 울고 떼쓰면 어떡해. 아기도 아닌데”.
품 안에서 나는 말로 주아는 얼굴을 끄덕이며 대화했다. 다음부터는 떼쓰지 말자고 일러주고 꼭 안아주며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약속한 거리만큼 함께 걷고 목마를 태워줬다.
아이가 떼를 쓸 때는 단호한 모습과 짧은 말, 차분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등 몇 가지 방법을 책이나 영상으로 봐왔다. 어설프게나마 따라도 해보기도 하지만 아이가 떼를 쓸 때면 매번 힘들다. 처음엔 같이 소리를 지를 거나 화를 낼 때도 있었고 그냥 울게 놔두고 자리를 피할 때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원하는 걸 들어주기도 했다. 아이는 성향에 따라 떼를 쓴다고 하지만 그것 말고도 분명 이유가 있다. 이유를 찾아보면 부모의 일관성 없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남을 해치거나, 예의 없는 행동,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훈육이란 이름으로 엄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안아달라고 할 때나, 과자를 사달라고 할 때나, 조금 더 놀다 가고 싶다고 할 때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돼 하며 끝내 내가 원하는 행동을 보이게 하는 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를 위한 것인지 늘 망설여진다. 정말 다리가 아프거나 힘들어서 안아달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과자가 정말 먹고 싶을 수도 있을 거고, 더 놀고 싶을 때도 있을 텐데. 이런 일들로 아이의 눈물을 볼 때면 사실은 나도 속으로 따라 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아듣고 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울리면서까지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한 번쯤 겪어야 할 자연스러운 단계인 것일까. 끝말 있기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어린 시절과 만난다.
‘우리 아이만큼은 나로부터, 부모로부터 절대 상처와 좌절을 겪게 하지 말자,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자’
내가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아이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겪지 못한 관계를 아이를 통해 대리하는 것은 아닐까. 내 부모의 잘못을 보속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원하는 부모상, 내가 원하는 자녀 모습, 내가 원하는 부모와 자녀 관계를 억지로 만들어가려는 것은 아닌지. 좋은 영향을 주면 바르게 성장할 거란 통념에 사로잡혀 좋은 부모라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화를 낸다고 나쁜 부모, 무관심하다고 나쁜 부모, 이해해준다고 좋은 부모, 냉정하다고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관계란 건 이런저런 모습 속에서 서로 이뤄나가는 것 아닌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아온 존재고 우리 아이 역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할 존재다. 하지만 자녀에게 좋은 것만 준다고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하진 않고 반대로 한다 해서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무언가로 영향을 받을 수 있어도 지배는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인간은 언제든 새로이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다. 바뀔 수 있는 존재다. 나는 그저 곁에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러면 주아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거라 믿는다.
옳다고 한 행동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무심한 행동이 용기를 주기도 하고 한다. 화를 낼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웃을 때도 있고 약속을 지킬 때도 어길 때도 있고 속일 때도 속아줄 때도 있다.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이는 게 관계 아니던가. 언제나 의도한 대로 원하는 대로 되로 되지 않는다는 것. 이건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잘 알게다. 그래서 이젠 애써 좋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쫓아가지 않고 정답 없는 좋은 부모 되기의 부담을 내려놓고 싶다. 그냥 아이와 함께 하는 그 시간만을 충실하고 싶다. 그냥 우왕좌왕 함께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