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값

82개월

by frarang

기도로 마무리되는 하루. 잠들기 전 아이는 엄마 따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는 실눈을 떠 엄마를 본다. 아직 기도 중인 걸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몇 분이 흐르고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동시에 기도를 마친 양 엄마를 보고 웃는다. 무슨 기도 했냐 물으면 주문을 외운 듯 술술 들려준다.


‘엄마 공장에 잘 다녀오게 해 주세요. 아빠 회사 잘 다녀오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 빨리 낳게 해 주세요. 할머니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누나 이빨 안 아프게 해 주세요. 형아, 다리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 화목하게 해 주세요….’ 레퍼토리를 읊는 중 아내가 말을 끊는다.

“근데 주아야? 우리 가족이 화목하지 않아?”

아이의 대답은 ‘응’이었다. 왜냐는 물음에 아이는 엄마, 아빠가 큰소리도 내고 가끔 싸운다고 말했다.


아내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싸우기도 하고 소리도 크게 낼 때도 있지만 다음날 화해하고 별일 없이 지낸다고, 또 같이 캠핑도 간다고, 우리는 화목한 거라고 설명했다. 아이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큰 걱정거리를 해결했다는 듯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해진 표정을 지었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 엄마, 아빠에게 번갈아 가며 어리광을 부리다 잠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와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로 맹세했건만 쉽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불이 되면 물이 되어야 했고, 누가 먼저 찌르면 찔린 몸통보다 찌른 마음을 헤아려야 했고, 쉴 새 없는 언어 매질엔 오히려 등을 내줘야 했으며,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앞서야 했다. 그러지 못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둘 사이에서 불에 데이고, 같이 찔리고, 온 마음에 피멍이 들고, 우리만 모르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그래도 웃고 떠들고 놀러 다니며 화목함을 느낄 순간이 더 많았을 텐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을 보듯 즐거웠을 순간에도 부모의 표정을 살폈을 아이를 생각하니 찡했다. 아이는 행복한 순간보다 행복하지 않았던 찰나를 더 오래 기억하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에게는 행복은 기본값이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생명을 지니면서 축복의 존재가 된다. 축하와 기다림, 설렘 속에서 자라나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는 행복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이다. 행복만을 지닌 채 살아가는 아이에게 불쑥 나타나는 부모의 날 선 목소리와 구겨진 표정은 불편하고 불안했을 것 같다. 애써 웃겨주고 선물을 사다 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지만 그 기억은 점점 기본값을 침범해 행복을 줄여갔는지도.


어차피 삶이란 애환의 뒤범벅으로 행복 기본값은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면 반대로 불행한 찰나보다 행복한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 같다. 결국 삶은 기본값을 얼마나 오랫동안 지키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화목이란 단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말하지 않아서, 표현하지 않아서 놓친 행복이었다.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건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한다고 표현하는 것, 이 또한 기본값을 채워가는 일임을 알게 됐다.


이제 아이는 우리 가족이 화목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오래도록 행복 기본값을 넓혀가고 지켜갔으면 좋겠다. 아이가 행복할수록 줄어든 우리의 기본값도 점점 채워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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