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학교에서 건강검진을 하는 날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친구들은 수업을 안 한다고 좋아서 뛰어다니는 판에 나는 긴장이 되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눈이 또 얼마나 나빠졌을지 걱정되어서였다.
초등학교 때 그나마 0.8 정도를 유지하던 시력은 중학교에 들어서며 계속 떨어졌고 언젠가부터는 시력검사판 맨 위에 쓰인 커다란 글씨 세 개도 흐릿하게 보이는 지경이 되었다. 안경을 써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안과로 발걸음이 가질 않았다. 안경을 쓰면 못생겨보일 거라는 사춘기스러운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도 시력이 너무 나빠져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하기가 왠지 무서워서 그냥 모른 척 해버렸던 것 같다.
모두에게 하나씩 있지 않을까, 들여다보기 두려워서 그냥 덮어두고 잊어버린 채 살고싶은 것들. 나의 나쁜 시력이 어쩐지 나한테는 그런 존재였다.
평생을 맨 눈으로 살다가 문득 안경을 써야겠다 결심한 건 엉뚱하게도 작년 여름에 자전거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늘 얼굴 코앞에 놓인 책이나 핸드폰을 보는 데에만 익숙하던 눈이 갑자기 지평선 끝까지 보려니 피곤했던 탓인지 여행 내내 눈 앞이 핑핑 돌면서 머리가 아팠다. 나중에는 산 위에 올라가 멀리 아래를 내려다 보려는데 공중에 투명 지렁이같은 것들이 슬금슬금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약간 어두운 방에서 책을 읽고 아이패드로 영상을 보다보니 눈은 다시 제 상태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눈은 나쁜 환경에서 무언가를 흐릿하게 대충 보는 데에 최적화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또 안경의 필요성을 잃어버리려던 어느 날 오른쪽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버렸다. 못 버티고 안과에 갔더니 눈병은 별 것 아니지만 안압도 높고 한 쪽 눈이 많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만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안경점에 가는 게 겁나지 않고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이직하고서 받은 첫 월급으로 마침내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안경점에 가서 시력 검사를 하고 새 안경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에 새로운 눈으로 볼 세상이 기대돼서 왠지 설렜다.
처음 안경을 쓰던 순간은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될 듯 하다.
두근거리며 안경을 쓰자마자 세상의 모든 불을 다 켠 것처럼 눈 앞이 환해졌다. 꼭 포토샵으로 채도와 선명도를 끝까지 높인 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쨍하니 생생해서 적응이 안 됐다. 약간 어지럽기도 해서 3D 안경을 끼고 영화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안경을 끼고 밖으로 나오니 생경함은 몇 배로 커졌다. 매일같이 걷던 거리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멀리 지나가는 차나 사람이 선명하게 보이거나 작은 글씨가 또렷히 보이는 건 둘째치고 온 데가 무슨 물감을 칠해놓은 것처럼 밝은 색감으로 빛났다. 잠깐 안경을 코 아래로 내려보니 이전에는 멀쩡히 보이던 것들인데 이제는 전부 흐리고 뿌얬다.
안경을 잠깐씩 내릴 때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눈으로 살아왔나 싶어서 억울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맑고 선명한 세상인데 한 겹 필터를 씌워서 보고 있었다니.
안경을 쓰기 전에는 나의 시야에 딱히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충분히 잘 보이는데 굳이 불편하게 안경을 써야하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한 번 안경을 쓰고보니 그 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졌다.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 순간이 찾아 올 때마다 속으로 웃는다. 사람이 얼마나 지난 일을 빨리 잊어버리는가 감탄하면서. 이직을 하고서 전 직장 연봉으로 살아남았던 게 갑자기 기적으로 느껴진다거나, 아이폰7에서 아이폰12로 바꾸고서 옛날에 좋다고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볼 떄라던가.
인생에서는 크고 작게든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아마 나에게 그 중 하나는 안경을 처음 쓴 날이 아닐까 싶다. 선명한 시야로 더 많은 것들을 눈에 담으려 여행을 떠날 그 날이 문득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