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에는 2주 정도 휴가를 썼다. 첫 주는 집에만 있으면서 은행 업무, 자전거 고치기 같은 밀렸던 잡일을 처리했다. 집을 떠나야 휴가 기분이 날 듯 하여 두 번째 주에는 5박 6일로 폴란드 크라쿠프(크라카우)와 자코파네를 다녀왔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물가는 미친듯이 저렴하고, 뭘 먹어도 맛있고, 사람들은 친절한데다가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을 풍경들까지. 혼자만 알기엔 아까울 정도로 좋은 여행이었으므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급히 기록을 남겨보기로 한다.
코시국에 폴란드 여행이란?
휴가지를 정할 때 가장 먼저 고려했던 건 그 나라의 코로나 신규 확진자 현황이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서유럽 국가가 리스트에서 지워졌고, 코로나에서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내가 사는 독일과 가깝고 비행기 값이 싼 여행지를 찾으려니 폴란드가 남았다. 코로나 이후 독일을 벗어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공항에서 살짝 긴장했지만, 백신 접종 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점 외에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QR코드 형태의 EU 디지털 백신여권을 제출했고 문제 없이 입국했다.
폴란드는 코로나가 종식된 듯한 분위기였다. 길거리 식당과 쇼핑몰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지만, 폴란드에서는 실외는 당연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안 쓴다. 슈퍼에서 장을 볼 때, 식당에 들어설 때, 대중교통을 탈 때,..거의 모든 생활이 2019년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크라쿠프에서 자코파네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승객들 중 나 혼자만 마스크를 쓴 채였다. 백신 접종자는 어디든 마스크 벗고 다닐 수 있다는 미국의 분위기가 이럴 것 같았다. 독일은 아직도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인데 옆나라 간에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놀랍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아시안 혐오범죄가 늘어났다는 뉴스때문에 유럽에서의 치안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미디어와 현실은 다르다. 길에서 1000명을 스쳐간다고 치면 999명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갈 길을 간다(0.001%의 문제상황에 대해 쓰자면 길어지므로 이번 포스팅에선 패스). 코로나가 어떤 병인지 조차 몰랐던 2020년 초반이라면 모를까, 원하는 사람은 모두 백신 접종을 완료한 데다가 마스크를 쓸 필요도 없는 지금이라면 굳이 아시안을 보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드물 것 같다.
여행 중에 영어가 안 통하는 상점에서 고생하고 있으면 나서서 통역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툰 현지어로 인사를 건네자 웃으면서 반겨주기도 했다. 혼자 여행하는 나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어준 현지인들 덕에 메신저 프로필 용 사진도 여러 개 건져왔다. 예전에 공산국가였으니 사람들이 딱딱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야말로 나의 건방진 편견이었다.
1500년 대 후반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 크라쿠프
크라쿠프는 내가 가 본 도시 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파리나 런던처럼 빈틈없이 꾸며진 도시들과 달리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이곳은 1500년대 후반까지 폴란드의 수도였기에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고, 세계대전 때 거의 파괴되지 않아 고풍스러운 구시가지가 그대로 남아있다. 걸어다니면서 높은 건물, 혹은 신축 건물을 하나도 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옛느낌이 가득한, 딱 유럽스러운 도시. 한편 올드타운 남쪽에는 바&카페 거리가 형성되어 있어서 힙한 분위기 물씬 풍기는 가게들로 생동감이 넘쳤다.
아우슈비츠,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이 근처에 있으니 크라쿠프에서 시간이 남는다면 당일치기 옵션도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여행 중에 잦은 이동을 선호하지 않아서 크라쿠프에서만 3박을 하며 시내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그냥 아무 골목이나 걸어도 예쁜 도시여서 한 달을 있으래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던 곳.
스위스만큼 멋진 뷰를 1/4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자코파네
자코파네는 타트라 국립공원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관광도시다. 내가 갔을 때는 가족단위의 여행객들로 마을 전체가 꽉 차있었다. 이곳에는 Morskie oko 라는 유명한 호수가 있고 이를 따라 초보자~고급 레벨의 등산로가 형성되어 있다. 나는 이 호수를 보기 위해 총 21km 가량을 등산하는 코스를 택했다.
한국에서는 등산로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안부를 건네며 정상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라는 격려까지 하곤 하는데, 내가 아는 유럽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자코파네에서 등산을 할 때도 오고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Hi라고 인사를 하다가 한 번은 폴란드어로 안녕하세요(진 도브레)라고 받아줬더니 중년의 폴란드 부부가 활짝 웃으면서 폴란드 말로 뭐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 칭찬이었겠지?
당장 판타지 영화의 배경으로 써도 손색 없을 풍경을 보면서 등산을 하니 힘든 줄도 몰랐다. 한 언덕을 넘을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장관에 감탄만 하다가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8시간 가량 산행을 하고 나니 다음 날은 쉬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이라도 더 보고 가자는 여행자의 마음가짐으로 한 번 더 산에 올랐다.
이번에 등산을 하면서 산은 올라간만큼 보여준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가면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경치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 노력을 들인 만큼 결과를 돌려주는 것들이 세상에 별로 없는데 등산만큼은 예외.
여행자에게 좋은 건 현지인에게도 좋은 걸까?
폴란드는 EU에 속해있음에도 '즈워티'라는 자국 통화를 사용한다. 여행자들은 보통 유로를 가지고 입국한 다음 현지에서 환전을 한다. 나는 100유로 정도만 먼저 환전을 했는데, 폴란드 물가가 예상보다 훨씬 더 저렴한 바람에 돈이 남을 지경이라 일부러 쇼핑까지 했다.
자코파네를 소개하면서 스위스의 1/4 물가라고 했지만, 이건 과장이 아니다. 8시간 등산을 하고 내려와 녹초가 된 날에 지구 상의 모든 음식을 다 먹을 기세로 자코파네의 유명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500ml 맥주 한 잔, 파스타 누들이 들어간 버섯스프에 메인디쉬까지 시키고도 팁 포함 금액이 11,50유로 정도였다(16000원 가량). 관광지 식당이 이정도라니. 독일이었다면 메인 음식 하나도 못 시키는 터무니없는 금액이다.
5박 6일 꽉 채워 여행을 하는 동안 교통비, 식비, 쇼핑 등 모든 경비를 포함해 300유로(40만원 가량) 밖에 쓰지 않았다. 전부 3성급 호텔에서 숙박을 했고 매 끼를 밖에서 사먹은 것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하게 다녀온 여행이다. 체감으로는 서유럽 물가보다 절반 이상 싼 듯 했다. 파리같은 도시는 호스텔 다인실 가격도 1박에 40유로가(53000원 가량) 넘는 곳이 태반인데.
그러나 저렴한 물가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 가격이 자국민에게도 싸게 느껴질지 궁금해졌다. 폴란드는 중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돈 냄새가 전혀 안 나는 나라여서 그랬던 것 같다. 예쁘게만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이 혹시 더딘 경제발전의 상징은 아닐지 의문도 들어서 폴란드 출신 친구를 만나면 이 나라 경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집에 돌아온 뒤 유투브로 올림픽 하이라이트를 보다가 싸이클링에 출전한 폴란드 선수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저 선수가 메달을 땄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응원을 하게 됐다.
나와 연결고리 하나 없는 나라에 방문해 추억을 만들고 친근감을 갖는 것. 미지로 뒤덮여있던 한 세계가 또렷한 형태로 내게 다가오는 것. 이런 재미에 여행을 한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