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남기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교실 한켠에 각자의 이름이 붙은 사물함이 있었다. 아마 실내화랑 교과서같은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던 이 사물함이 불편해진 건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각자의 장래희망을 종이에 적어 이름표 아래 붙이자고 제안한 뒤부터였다.
모두가 경찰관, 선생님, 축구선수같은 것을 적어 붙일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판사'라고 써야만 했다. 다른 친구들과 전혀 겹치지도 비슷하지도 않은 내 장래희망이 부끄러워서, 다같이 사물함에서 무언가 꺼내야 할 때면 혹여나 옆 친구가 볼까 손가락으로 판사라는 글자를 가린 채 후다닥 문을 열고 닫았다. 판사가 뭐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자신이 없었기에.
뭔지도 모르는 직업을 장래희망 란에 쓰게된 건 아빠의 덕이 크다. 당시 아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너는 나중에 반드시 판사가 되어라'고 거의 주입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도 나도 현실을 깨달았고 그 허황된 장래희망은 내 생활기록부에서 사라져갔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실현가능성 있는 장래희망을 고민해보게 되었고 그 답은 기자였다. 기분에 따라 어떤 때는 극작가나 라디오 작가를 적기도 했으나 결국 나는 무언가 쓰는 사람이 되고싶었다. 하지만 야무진 친구들과 달리 나는 장래희망을 이뤄내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고 사실 굳이 기자가 되고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외에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수능 점수에 맞춰 국문과에 입학했다.
다들 나처럼 애매한 마음으로 대학에 입학했겠거니 싶었는데 이미 1학년 때부터 임용고시 준비를 마음먹은 친구들도 있었고, 유학을 계획하는 쪽도 많았다. 뭐가 됐든 다들 본인의 갈 길을 정확히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나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다. 여대에서 학사를 졸업하는 데에 8년이 걸렸다고 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겠지. 한 번은 '오랜만에' 수업에 갔다가 교수님으로부터 "학생은 어차피 F받을 거니까 굳이 출석하지 말라"는 공개망신을 당하고 그냥 집에 온 적도 있다.
20대 내내 나의 장래희망란은 비어있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도피성 해외여행을 가는 패턴을 몇 년이나 지속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쉬움에 혼자 눈물흘리고 하늘에 떠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언제 다시 저기에 타보나 공상에 잠기는 상태였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환상의 세계를 찾아 열심히 부유하는. 이 지경이다보니 우선은 한국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겹쳐 지금 독일에서 살게된 것도 20대에 날려버린 몇 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직업적, 경제적 안정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이후로 몇 년만에 장래희망이 다시 생겼다.
직장인. 나는 직장인이 되고싶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를 받는지는 상관이 없었고 독일에서의 내 생활을 안정시켜줄 직장이면 충분했다. 이 나라가 제공하는 노동혜택을 다 받을 수 있고, 아플 때 쉬고 남들 놀 때 휴가가는 직장인. 고등학생 때의 내가 들으면 기절을 할 일이다. 어떻게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냐며 나는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나이 30을 바라보는 시점에 꿈이 직장인이 되다니.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직장인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되었는데도 행복하지가 않았다. 행복은 커녕 아침에 일어나면 극심한 두통에 시달릴 정도의 스트레스가 이어졌다. 일부러 사람을 미치게 할 목적인가 싶게 행동하는 직장상사, 갑갑한 회사 분위기에 목이 졸려갈 때 즈음 새로운 장래희망이 생겨났다.
독일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그래. 독일에 왔으면 한국회사가 아니라 독일 회사에 다녀야지.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거야.
내가 원한 건 단순했다. 일방적인 지시를 받는 게 아니라 상사나 동료와 대화할 수 있는 문화. 휴가를 가야할 때는 눈치보지 않고 쉴 수 있는 환경. 재택근무가 가능한 곳. 실수를 해도 고성을 지르거나 남들 앞에서 면박주지 않는 상사. 사실 독일에서 별 것 아닌데 내가 다녔던 한국 회사에서는 거의 쿠데타 수준의 요구였다. 회사는 나를 위해 바뀌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싫으면 내가 떠나야지.
심심하게 썼지만 사실은 꽤 간절한 마음으로 이력서를 돌렸고 독일 생활 6년만에 마침내 독일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무엇인가, 꿈을 이룬 모두가 죽을 때까지 해피엔딩이라면 심리상담도 자기계발 유투브도 다 존재할 필요가 없겠지.
외국인이라는 불리한 조건에 독일에서의 학위도 없는 나는, 지금까지의 업무 경력만을 무기로 삼아 이직해야 했고 결국은 원하는 연봉을 받지 못 한 채 계약서에 싸인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근무환경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이 흐릿해졌다. 그러자 잘 치고 나가는 주변 친구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를 사고, 집을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서늘했다.
그런데, '연봉을 얼마 이상 받는 독일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은 어쩐지 장래희망으로 와닿지 않았다. 왠지 그게 열쇠가 아닌 것 같은 의심이 들었다. 무언가 현재에 불만족스러운데 이유는 찾을 수 없고 괜히 조급해지던 시간이 이어졌고 얼마 전 친구와 저녁을 먹는 날이었다. 친구도 마침 인생에 구멍난 부분 투성이라 한참 삶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친구가 말했다.
"혹시 내가 꿈이 없어서 이렇게 밖에 못 살아왔나? 평범한 삶을 원한 게 잘못이었을까? 사업을 해야할까?"
무언가 거창한 혹은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있어야만 사람이 행복하지 않겠냐는 게 친구의 논지였다. 내게 꿈이 없냐고 물어오는 친구 앞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조차도 의외였다.
자전거 타는 할머니. 나는 자전거 타는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야.
판사가 되면 돈과 명예를 얻고 신분상승 할 수 있을 거야. 기자가 되어 매일 글 쓰는 걸로 돈을 벌면 행복할 거야. 한국을 나가야 행복할 거야. 직장을 잘 잡으면 행복할 거야...음, 아니야. 이런 식으로는 죽을 때까지 만족이 없지.
자전거 타는 할머니로 늙기 위해 젊음을 보내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다. 다음에 더 좋은 회사로 옮겨야 하고, 연봉을 얼마를 높여야 안정될 거고 그런 것은 다 잊어버려. 엉뚱한 데 보며 질투와 억울함으로 시간낭비하는 대신에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봐야 한다. 편안하게 나이들기 위해서는 스스로와의 평화가 필수적이기에. 의미 없는 음식을 욱여넣는 대신 한끼한끼 정성스럽게 먹고 시간 내서 운동하기. 지금 나의 가장 큰 취미인 자전거 타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돌보기. 그게 내가 가야할 길이다.
이것 이상의 장래희망은 없어.
ps.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스스로 적어낸 장래희망은 농부와 꽃집 주인이었다. 태생적으로 평화를 좋아하고 경쟁을 싫어하는 내가 독일로 넘어와 해외생활을 이어가고 도전을 지속하는 것 자체에 가치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