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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 May 26. 2020

독일에서 집밥 해먹기(feat. 코로나)

잘 사는 법 궁리하기 2: 집밥 잘하는 법

내 요리실력은 살면서 세 번쯤의 시기를 거치며 일취월장했다. 최초의 도약은 대학교에 입학한 해. 친구들과 이것저것 먹으러 다니면서 자연스레 집에서도 다양한 요리를 시도하게 되었다. 물론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딱히 자주 요리를 해먹었던 건 아니다. 독일에 오면서 대부분의 끼니를 스스로 해먹느라 요리가 비로소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코로나의 시대를 맞아 문자 그대로 하루 세 끼를 매일매일 직접 해먹으며 대단한 발전을 이뤄내었다. 먹고싶은 음식이 있어도 식당이 문을 닫았으니 집에서 해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가 터키 마트에서 무와 배추를 사다가 김치까지 담가 먹을 줄은 몰랐다.


박막례 할머니 레시피로 만든 국물떡볶이와 야채만두(+맥주).

코로나 때문에 일상에 제약을 받으며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는 날들을 살다 보니 잘 해먹는 게 꽤 중요하다. 요즘은 하루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생일날에는 김밥하고 당근케익을 먹었지', '그저께는 집에서 친구들하고 바베큐 해먹은 날' 대충 이런 식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매일 집밥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에, 요리를 직접 해먹는 건 꽤 사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작은 종이에 장보기 목록을 쓰는 것부터, 좋아하는 재료들을 정성스럽게 다듬고 마침내 내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눠먹는 것까지 모든 순간이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한 시간.


독일에 와서 내 요리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는데, 첫 번째가 고기 없이 요리하기(독일의 요즘 트렌드는 비건, 베를린은 비건 천국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두 번째가 베이킹이다. 빵과 케익은 독일의 대표적인 '집밥'이다. 코로나로 사재기가 시작될 때도 모든 마트에서 이스트와 밀가루부터 동났다. 한국에 살 땐 집에 오븐도 없었고, 맛있는 게 하도 많아 굳이 빵을 직접 구워서까지 먹을 생각은 안 했는데 독일 친구들이 집에서 머핀이나 파이를 굽는 걸 보니 재밌어 보여서 나도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베이킹을 시작했다.

이탈리안 레시피로 만든 티라미수(또..맥주)

티라미수는 오븐이 필요 없고, 정확한 레시피만 있으면 한 판을 만들어 며칠 두고두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디저트다. 달고나 커피를 젓는 심정으로 달걀 흰자 머랭을 치고, 노른자에 설탕과 마스카포네 치즈를 넣어 휘젓다보면 어느새 완성. 크림이 굳을 때까지 냉장고에 넣어 뒀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만들자마자 먹느라 약간 뭉개졌지만 환상적인 맛이었다. 커피와 최고의 궁합인 디저트지만 여기는 독일이니까(?) 맥주와 함께 먹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

딸기쨈을 섞은 빵 위에 딸기크림과 딸기를 올린 '봄 케익'

베이킹을 하다보면 왠지 내가 꼭 연금술사같다. 밀가루, 설탕, 버터,.. 무엇 하나 빵처럼 생긴 재료가 없는데도 휘리릭 젓다보면 어느 새 꾸덕꾸덕 해지는 게 매번 신기하다. 과연 맛이 잘 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뜨거운 오븐에 던져넣고 그 앞에 앉아 부풀어오르는 걸 지켜보는 과정도 즐겁다. 요상하게도 아무리 맛 없는 빵을 만들어도 오븐에선 달달한 향기가 난다. 심지어 어떤 땐 빵을 태워도 집에선 녹녹한 버터 냄새가 한가득. 이 냄새가 좋아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일부러 쿠키를 구운 적도 있다. 무엇보다 베이킹의 좋은 점은 여러 명 먹을 양을 구워낼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팍팍한 시기일 수록 음식과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부활절날 친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싼 김밥(+다시...맥주)

한식 중에 여러명과 나눠먹기 좋은 음식은 바로 김밥이다. 여러 명과 꼭 나눠먹어야만 하는 음식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말면 기본 10줄은 나오는데다 금방 쉬어버리니 오래 보관도 어려워서 내가 김밥이 먹고 싶은 날은 일부러 친구들을 다 불러 나눠먹곤 한다. 레시피를 아는 사람이 나 혼자이니 몇 시간이고 부엌에 서서 썰고 볶고 말아야 하지만 그 과정이 싫지 않다. 


김밥을 마는 날마다 엄마 생각이 나기 때문일까. 엄마는 유치원 소풍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줬다. 그리고 도시락 통 안에 작은 쪽지를 꼭 하나씩 넣어뒀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면 엄마가 어떤 내용을 써서 김밥 위에 올려두었을지 궁금해하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선 김밥이 천 얼마쯤 주고 사먹는 간단한 분식이었는데, 직접 해먹다보니 김밥과 얽힌 옛날 기억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젊은 엄마가 새벽에 혼자 김밥을 마는 뒷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엄마를 못 만난지 1년 반..)

월남쌈을 직접 말아 땅콩소스에 콕

김밥 마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들을 싹 털어버릴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 백종원 아저씨가 그랬던가. 아무거나 김 올린 밥에 넣고 말면 김밥이라고. 멀쩡하던 재료를 방치해뒀다 상해서 버리는 것만큼 마음 아픈 일이 없는데, 김밥 하나면 고민 끝. 사실 더 쉬운 건 월남쌈이다. 시들어가는 야채부터 시작해서 넣고 싶은 거 아무거나 넣고 말아 땅콩소스에 찍어 먹으면 건강하고 맛있게 한 끼 해결. 나는 아시안 마켓에서 작은 사이즈의 라이스페이퍼를 잔뜩 사놓고 온갖 걸 말아먹는다.

직접 만든 오늘의 저녁: 계란볶음밥, 야채만 넣은 짜장소스, 오이/양파 장아찌, 배추김치

고맙게도 눈치를 채 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플레이팅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편이다.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꼭 그릇에 덜어먹고, 냄비 째로 식탁에 가져오지 않는다. 밥을 해먹는 건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도 모르는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으면 마음도 쉽게 지친다고 믿는다. 그래서 회사에서 유난히 힘들었던 날엔 더 악착같이 맛있는 걸 요리해서 예쁘게 담아먹었다. 시원한 맥주를 한 손에 들고 좋아하는 음악을 큰 소리로 들으며 나를 위한 한 끼를 정성스레 해먹으면 당장 입안의 행복 말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코로나가 불러온 일상의 제약이 버겁고 지겹지만, 집밥의 사랑스러움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줬다는 점에선 고맙게 생각한다. 가족을 다른 말로 식구라고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행복하든 슬프든 밥 때가 되면 같은 식탁에 앉아 음식의 온기를 나누는 사람이 가족이니까. 그래서 내일은 뭘 해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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