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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라우킴 Jul 12. 2020

엄마의 정체성과 내 자아 사이에서

첫째를 어렵게 가졌다.


회사 생활하면서 스트레스 강도가 컸는지 한 번의 유산을 경험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기다리던 아이를 만나러 산부인과에 갔는데 초음파로는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차 안에서 핸들을 붙잡고 엄청 울었다. 그 슬픔은 당시 나를 힘들게 했던 회사 상사에 대한 미움으로 옮겨졌고, 아이를 갖고 싶은 간절함은 더욱더 깊어졌다.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매일 저녁 왕복 두 시간 자전거 운동을 했다. 엄마가 되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건강한 아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더더욱 정성을 기울이며 아이를 키우리라 다짐했었다. 한 번의 실패로 임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극복하는데 조금 힘이 들었다. 산부인과 선생님의 진료실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기다리던 임신을 확인 한 날, 보란 듯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정의한 ‘좋은 엄마’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책 한 권씩 읽어주고, 삼시 세끼 집밥으로 정성스럽게 차려주고, 머리도 정성스레 묶어주고, 철이 지나면 새 옷 입혀주고, 좋은 것 이쁜 것만 보여주는 엄마였다. 꿈이 너무 컸던 걸까. 지난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난 그냥 저질체력의 엄마였다. 밤사이 그날 하루에 쓸 분량의 에너지만 충전하고 다음날 바로 소진해 버리는, 오래가지 않는 저렴한 배터리 같은 그런 엄마였다.


내가 가진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내가 세운 기준들에 부합하기 위해  계속 채찍질했다. 나에게 엄마로서의 직업은 극한 직업이었다.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들이 연속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좋은 엄마도 체력이 받쳐줘야 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매번 잘하고 싶었지만 내 뜻대로 잘 안되면 마음이 힘들었다. 마음이 힘드니 몸도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 짜증과 불안은 고스란히 남편에게 넘어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독립을 하게 되면, 엄마의 수고를, 엄마의 애씀을 기억해 줄까. 솔직히 그런 것을 기대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커서 그렇게 느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감정과 생각이 있기에 나의 욕심을 채울 수는 없다. 내 욕심으로 인해서 내가 아이들에게 허튼 기대는 걸고 싶지 않다. 엄마가 되려고 커리어를 포기했다는 말을 아이들이 공감이나 할까?


‘좋은 엄마'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재미있게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재미있게 사는 엄마는 도대체 어떤 엄마일까?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겁고, 흥미롭고 행복하게 느낄까? 그 순간을 잘 알고 그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국 나 자신을 내가 가장 잘 알아야 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가 충분히 좋아하는 일을 찾을 기회가 있었는데, 노력도 하지 않고 시간을 유유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때가 이미 늦었을 땐 누구를 탓하는 그럼 사람은 더더욱 되기 싫다.


요즘은 집에서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책을 읽는 부모 옆에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있다’라는 문구를 어디서 보았다. 진짜 인지 아닌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들보다 내가 책을 보는 게 더 중요해졌다. 하루라도 새로운 걸 배우지 않는 날은 목이 마르다. 매일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그 시간만큼은 엄마로서가 아닌 내가 나로서 나답게 되는 시간이다. 해외여행도 부럽지 않다(이제는 가고 싶어도 못 가지만). 책 한권만 있으면 난 이미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둘째가 학교 온라인 수업 마치고 잠깐 노는 사이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했었다. 아이가 방에서 색종이 뭉치와 가위, 풀을 들고 티브이가 있는 서재 방으로 바삐 들어갔다. 네모 아저씨 유튜브를 보며 종이접기를 할 거란다. 잘 됐다 싶었다. 난 글쓰기에  슬슬 시동을 걸 참이었다. 하지만 몇 분도 안되어 엄마를 급하게 부른다.


“엄마! 이거 너무 어려워요, 같이 만들어주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온다. 엄마가 지금 좀 바빠서 혼자 어떻게 해보면 안 될까라는 말을 하려다 꾹 삼켜버렸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 서재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낑낑거리며 '입체 변신 표창'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봐도 너무 어려워 보였다. 좀 더 쉽고 재밌는 종이접기도 많은데, 다른 걸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해 볼까 하다가 아이의 표정을 보니 꼭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아 같이 낑낑거리며 도와주었다.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할 때는 예상치 못한 변수는 늘 찾아온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도 내 머릿속은 온통 책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가끔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하고 싶은 것도 정말 많지만, 또 어느새 금방 커버릴 아이하고도 최대한 같이 오랫동안 있고 싶다. 나는 매일 엄마로서의 정체성과 내 자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줄다리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날마다 더 단단해지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육아란 결국 아이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긴 시간을 통해 깨닫는 과정입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내 뜻대로 안 돼도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죠. 가장 아쉬운 마무리가 어떤 건지 아십니까?
내 뜻이 너무 강해서 아이와 보낸 긴 시간을 전혀 즐기지 못했을 때입니다.

<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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