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 사용설명서
많은 내담자들이 용기 내서 찾았던 상담에 실망을 합니다. 기대가 클수록 그 실망은 더 큰 것 같고요. 어쩌면 이 글은 저와 제 동료들을 위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늘 이상적인 상담자라면 단 한 번의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깊은 치료적 대화가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교과서에 나오는 위대한 치료자들은 물론이고 당장 TV에 나오는 오은영 박사님만 보더라도 얼마나 놀라운가요. 그런 분들과 비교하면 저는 늘 초라할 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상담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간단한 정보는 좀 더 현실적인 기대를 통해 내담자 입장에서 좀 더 만족스러운 치료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되어 주는 것 같아요.
첫 상담에서 흔히 겪는 실망
제가 꽤 많이 듣는 이야기는 "말할 수 있어서 시원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해결된 것은 없고 상담자에게서 전문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거에요. 첫 상담에 대한 높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종종 이러한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자녀를 데리고 오는 부모님들은 단 한 번의 상담으로 자녀의 상태에 대한 완전한 진단과 해결책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온갖 방법을 써도 아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스스로가 나쁜 부모라는 오명을 얻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찾아온 상담인데요. 상담자에게 특별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머리로는 한 길 사람 속을 한 번에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이해하면서도 밀려드는 실망감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예상 하시듯 아무리 경험 많은 상담자라고 하더라도 첫 상담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어내기는 매우 어려워요. 사실상 첫 상담은 상담에 온 목적과 기대하는 바를 이해하고 상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확인한 후 큰 방향을 정하는 회기가 되는 편이구요. 이것마저도 한 회의 상담에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당장의 고통이 큰 내담자일수록 우선은 그것을 위주로 풀어가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만약 부모에 의해 상담실에 '끌려온' 미성년 내담자라면 강제로 상담실에 올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 생기게 되는 속상함과 모멸감 같은 것들을 우선 존중하며 다루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이처럼 상담에는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단계가 필요한 편이에요.
첫 상담의 목적에 따른 차이
우선 첫 상담은 내담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크게 평가를 원하는가 치료를 원가는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우선 평가를 원하는 경우 이것은 주로 내담자가 '내가 무언가 잘못되었는가', '혹은 '내가 어떤 증상을 갖고 있는 건가?'를 궁금해 하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미성년 내담자를 데려온 부모님의 경우에는 '내 아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외의 비밀을 갖고 있는건가?' 또는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나 증상을 갖고 있는 것가?'라고 할 수 있겠고요.
평가를 원하는 경우 크게 두 가지 영역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고통이 내담자의 특성에 해당하는, 기질적이거나 선천적인 요인에 의해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이전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다가 특정한 상황으로 유발된 고통인지를 구분하는 거에요. 물론 대체적으로는 그 두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편이고요.
이런것들보다 앞서 평가되어야 하는 영역은 사실 상담실에 와 있는 지금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인데요. 현재의 상태가 어떤지 파악이 되어야 그에 맞춰 다른 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재 이 사람의 상태가 평가나 치료 작업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을 준비시키는 과정이 필요할테니까요. 자발적으로 상담실을 찾은 내담자라고 하더라도 막상 심리치료의 방식에 내담자가 동의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라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중 첫 상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지금 어떠한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내담자가 치료나 평가 작업에 참여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거죠. 특히 억지로 상담실에 올 수밖에 없었던 청소년을 대하는 상담은 지금 어떠한가를 파악하고 상담 자체를 가능한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억지로 끌려온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전문가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나라는 사람을 평가하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댄다고 생각해 보세요.
치료자의 관점
이런 맥락에서 치료자의 입장에서는 내담자의 당장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선 치료자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모든 역량을 동원하도록 훈련을 거친 사람이에요. 그게 상담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간의 훈련에 의해 상담자의 마음 가짐은 우선적으로 내담자의 안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은 치료자-내담자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도 당연한 일이죠. 심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지니까요. 뿐만 아니라 내담자의 심리적 안정은 효과적인 치료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합니다. 심리치료에서 내담자는 단순히 가만히 앉아 치료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상담자와 함께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적극적 참여자이어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내담자의 고통이 크거나 위기 상황에 있을 때는 평가적인 접근보다 지지와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담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도 당장의 고통이 큰 상황에서 분석적이고 평가적인 상담은 비인간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담자 입장에서의 적절한 기대와 마음의 준비
이런 배경을 알고 있을수록 치료 작업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늘 상담초반에 심리상담은 그 방법과 목표에 내담자가 동의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에요. 프랭크 여만은 [전이초점 심리치료를 위한 임상 가이드]에서 기본적인 상담의 규칙들을 세팅하는 것은 의사의 수술실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멸균실과 수술도구, 의료진이 갖추어지지 않은 수술이 성공적일 수 없듯 심리치료 역시 정해진 규칙과 기본적인 조건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내담자로서 첫 상담에 임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기대와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적절한 기대 설정하기
첫 상담은 시작점임을 이해하기: 모든 답을 얻기보다는 치료 여정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세요.
점진적 변화 기대하기: 심리적 변화는 대개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즉각적인 해결책보다는 점차 나아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세요.
진단과 치료는 별개임을 인식하기: 정확한 진단이 내려졌다 해도 치료는 또 다른 여정입니다.
마음의 준비
개방적인 태도 유지하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준비를 하세요. 치료자는 판단하지 않고 당신을 이해하려 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기: 때로는 어려운 주제나 감정을 다룰 수 있음을 인정하세요. 이는 치유 과정의 일부입니다.
인내심 가지기: 자신을 이해하고 변화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과정입니다.
능동적인 참여자 되기: 치료는 치료자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담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가장 효과적입니다.
첫 상담 전 준비할 것들
주요 증상이나 어려움을 간략히 정리해보기
상담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현재 복용 중인 약물이 있다면 목록 준비하기
궁금한 점이나 우려사항을 미리 적어두기
당연한 거지만 이런 것들을 모두 지키거나 숙지하실 필요까지는 없구요. 이런 권장 사항들의 전체적인 느낌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치료는 '현 상태의 평가-안정-고통에 대한 현재와 원인의 평가-치료 세팅에 대한 설명과 동의-치료'의 흐름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실제 상담은 다양한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이건 순차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구요.
첫 상담은 치료자와의 관계 형성을 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서로 맞는지, 신뢰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때로는 첫 번째 만난 치료자가 자신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실패가 아니라 자신에게 더 적합한 치료자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맺음말
모쪼록 첫 상담의 실망감이 이후의 소중한 치유 과정을 놓치게 하는 장벽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변화나 한 번의 명쾌한 통찰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장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심리적 성장과 치유는 대개 조용하고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인내와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상담실의 문을 두드린 용기는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용기가 실망으로 꺾이지 않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장하는 여정의 첫걸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치유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정확한 진단이나 화려한 기법이 아닌 진정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과 서로에 대한 신뢰일지도 모릅니다. 그 신뢰 속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치유되며,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