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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드리머 Aug 30. 2024

쿠알라룸푸르 3개월이 남긴 것

우리의 발견 그리고 행복의 순간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


 아이들을 10년 넘게 키우면서 직장을 다닌 기간은 고작 2개월뿐이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지속할 수 없었고, 그 시간을 제외하면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며 보살펴왔다. 나름 세심하게 아이들을 돌봐왔고,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낸 3개월 동안 전혀 몰랐던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피아노나 수영 외에 학습을 위한 학원을 다닌 적이 없던 아이들이기에, 그 변화가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영어캠프에서 아이들이 작성한 예문과 라이팅 숙제는 선생님께서 빨간 펜으로 첨삭해 주셨다. 캠프 초반에 2호는 선생님의 체크를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며, 스스로 너무 못하는 것 같다고 속상해했다. 이 모습을 보며, '아이가 공부에 대한 열의가 있구나'라는 생각에 살짝 안심되기도 했다. 빨간 펜의 표시가 많을수록 배움이 많아진다는 뜻이라고,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아이가 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1호에게도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선생님의 첨삭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그게 배우는 거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두 아이의 반응은 달랐다.


 평소에도 2호는 "나는 공부를 잘 못해, 잘하고 싶은데 하기는 싫어, 노력하지 않고 잘할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종종 말했다. 말로는 노력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빨간 펜의 체크를 줄이고 싶었는지, 숙제를 마친 후에는 노트를 건네며 내게 확인해 달라고 했고, 스스로도 재차 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단어 시험에서도 100점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을 보였고, 3일 연속 100점을 받았을 때는 기뻐하며 사진을 찍어 외할머니에게 직접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엽고 기특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노력하는 아이의 태도가 고마웠다.


1호는 진중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수영장에서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 금세 어울려 놀았고, 어른들과도 이야기를 잘 나누었다. 감정 표현이 크지 않던 아이가 더 크게 웃고 표정도 밝아진 것이 신기했다. 학원을 다니며 스스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서였을까? 가장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라이팅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아이가 스스로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리 부부는 또 한 번 놀랐다.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던 1호였다. 학교 다니는 내내 학교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자주 불평해 내심 신경이 쓰였고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저녁에 종종 "빨리 내일이 오면 좋겠어"라고 말하곤 했다. 이유를 물으면 "아침에 OOO(학원이름)에 가잖아~ 빨리 가고 싶어."라며 혼자 깔깔 웃곤 했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즐기고 성장할 수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Unsplash의Nathan   Dumlao




우리의 재발견


 친구들보다 조금 빠르게 결혼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고, 그 시간은 책과 함께였다. 그 덕에 혼자가 익숙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점점 불편해졌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기회도, 의지도 없었으며,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지내면서 스스로를 낯선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도 수영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시간을 통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웠던 것이다.


 결혼 생활이 10년이 넘었지만, 늘 바빴던 남편과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3개월 동안 작은 집에서 머물며 물리적으로 가까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졌고, 아이들이 학원에 가 있는 동안 점심시간에 둘이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서 아이들끼리 먼저 친해져 가족 모임으로 이어진 저녁 자리에서 깨달았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부부동반으로 술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 시간은 예상외로 유쾌하고 즐거웠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헬스장이 있었지만, 1년 넘게 살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요가원을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주 2~3회 수영을 하곤 했다. 헬스장에 가야겠다고 수십 번 다짐했지만, 실제로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쿠알라룸푸르에서의 3개월 동안, 친구가 없던 남편이 저녁마다 헬스장을 찾기 시작했다.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한 후 수영으로 마무리하는 루틴이 생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의 변화를 느끼며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에 돌아가서도 헬스장을 찾는 '운동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환경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깨달았다. 이 경험은 앞으로도 많은 도전과 변화를 즐기며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소소한 행복의 순간들


 영어캠프에 참여하는 동안 주중에는 학원을 다니느라 바빴고, 주말에도 어딘가 가기를 원하지 않는 집순이 딸들이었다. 주변 많은 가족들이 주말마다 투어를 하느라 바빴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큰 마음먹고 다녀온 곳이 워터파크인 '썬웨이 라군'이었다. 동물원과 놀이공원이 함께 있는 워터파크였지만,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다른 곳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워터파크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점심으로 버거킹을 먹던 중, 2호가 웃으며 말했다.

"아~ 행복하다. 엄마 같은 사람이 내 엄마라서. 아빠 같은 사람이 내 아빠라서."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수영복 바지를 깜빡해서 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더위와 씨름했던 지루한 시간이 아이의 이 한마디로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2023년 1월, 주말을 포함해 3박 4일간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떠났다. 겁이 많은 아이들은 13살, 11살이었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외진 곳에 숙소를 잡았던 탓에 바닷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처음으로 파도타기에 도전하기로 했다. 썬베드에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니, 구명조끼를 입고 튜브를 챙겨 바다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조금 뒤,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와 “엄마! 내가 왜 전에 파도타기를 안 했지? 튜브 타고 있을 때 파도가 밀어주는 느낌이 너무 좋아.”라며 금세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이들이 바다에서 튜브를 타는 모습을 보며, 6학년 때 제주도 여행을 떠올렸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를 튜브에 태우고 바다에 들어갔던 아빠.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파도를 타며 아빠와 눈을 맞추고 웃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릴 적 추억은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릴 때 귀가 안 좋아 수영을 못했던 아빠지만, 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튜브를 꼭 잡아주던 그 모습이 떠오르며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아빠를 추억하듯이 아이들도 언젠가 아빠를 추억하게 될 날이 오겠지? 





대문사진: Unsplash의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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