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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드리머 Sep 26. 2024

발리 한 달 살기 시작은, 꾸따


갑자기 영어 아웃풋이 터지네?


 조식을 먹고 엄마와 함께 유심을 사기 위해 숙소 앞을 나섰다. 길가에 들어서 저 마자 호객꾼들이 우리를 둘러싸며 서로 데려가려고 안달이었다. 그들의 과잉 친절과 호객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곳에서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2개의 유심 가격을 70만 루피아(약 6만 원)라고 부르는 상인에게 미리 조사해 둔 정보를 바탕으로 단호히 거절했다. 마침내 21만 루피아(약 1만 8천 원)에 두 개의 유심을 구매하고, 작은 성취감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랑 같이 아침산책을 나섰다. 아침에 커피가 빠지면 하루를 시작하기 어려운 탓에, 먼저 카페부터 들렀다. 영어로 적혀있는 메뉴판을 두 아이가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왠지 신기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못 갔는 기간 동안, 아이들에게는 영어인풋의 시간이 되었던 모양이다. 영어에 눈을 뜨고 첫 여행지인 발리에서 아이들은 이제 영어를 읽을 수 있다며 신이 난 듯 보였다.


2호가 주스를 마시다가 갑자기,

"My first wish is go to 숙소, please" 

갑작스럽게 영어로 말하는 아이가 기특해서 웃으며 알겠다고 했더니, 아이는

"Oh~ my firt wish came true."라고 대답했다.

'come true'라는 표현을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보니, 즐겨 부르는 팝송에서 봤다고 한다. 

"이루어지는 거라던데? 몰라서 번역해 봤지."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노래 가사를 검색하더니 스크린샷을 보여주었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아이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묘한 해방감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발리의 작은 호텔. 다양한 언어들이 들려오지만,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한국어로 대화를 나눠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한국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항상 영어권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어디를 가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못 나누는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니 오히려 조금 안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7~8월이 발리는 건기라 그런지 전혀 덥지 않고 오히려 선선했다. 푹신한 쿠션이 깔린 썬베드에 몸을 눕히자,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바람이 나를 감싸 안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가볍게 들리고, 나무들 사이로 퍼지는 은은한 꽃향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평온함'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며 눈을 감고 이 모든 소리와 냄새, 바람을 온전히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어떤 걱정도 불안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나를 감쌌다.


 23살 때, 친구와 처음으로 발리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삐끼들이 일본어나 중국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고, 한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길을 걷다 보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종종 듣게 된다. 해외에 나오면 한국의 위상이 실감 난다. 처음 발리에서 삐끼들을 봤을 때는 그들이 자유롭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정작 그들에게 따뜻하게 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매일 낯선 외국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삶을 살면서 그들은 어떤 마음일까? 과거 우리나라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스로 어느 나라 국민이 될지 선택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꾸따에서의 일정


 20대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조식을 먹고 저녁까지 강행군을 하며 여러 장소를 다니는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내 여행 스타일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많은 장소를 도장 깨기 하듯 방문하는 일이 거의 없고, 특히 수영장이 있는 동남아 여행에서는 더더욱 여유를 즐긴다. 꾸따에서 머무는 동안 내가 계획한 일정은 짐바란, 울루와뚜, 워터붐, 그리고 서핑하기가 전부였다. 일몰을 즐기며 씨푸드를 먹을 수 있는 짐바란 해변에 갔던 날,  저녁을 먹다가 2호가 말했다. “지금 여기 있어서 행복해.” 이보다 더 완벽한 시간이 있을까 싶었다. 발리를 떠나기 전에 다시 오자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에게 '서핑'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주려 했는데, 출발 4일 전 2호가 발목 인대를 다쳤고, 1호는 동생 없이 서핑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남편 혼자 1:1로 서핑을 배웠지만, 허리에 무리가 와서 단 한 번으로 끝나버렸다.  


 울루와뚜에서 공연을 보러 가는 날, 검색해 보니 원숭이가 공격적이라는 글을 많이 보았다. 핸드폰과 안경, 선글라스를 빼앗길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우리를 데려다준 기사님도 원숭이를 조심해야 한다며 안경과 선글라스를 빼는 게 좋다고 하셔서 가는 내내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원숭이는 멀리서만 보였을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깨작 댄스 공연은 새롭긴 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재미는 없었다. 2호는 지루했다는 평을 남겼다. 반면, 1호는 한국어로 된 설명서를 전부 읽고, 옆에 앉아있던 아빠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가족 모두가 다음부터는 1호 옆에서 공연을 봐야겠다고 하자, 1호는 으쓱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들의 밤 수다


 꾸따의 숙소는 두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킹베드 룸은 엄마와 아이들이, 싱글베드 두 개가 있는 방은 우리 부부가 사용했다. 아이들을 재운 후, 엄마가 우리 방으로 건너오셨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미리 사둔 과자와 맥주를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엄마에게 처음 듣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1월생이라 6살에 7살 아이들과 유치원을 함께 다녔는데, 어느 날 유치원 원장선생님이 전화로 내가 유치원에서 아이큐가 가장 높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 말해주다니! 진작에 공부를 열심히 시켜보지 그랬어?"라고 했더니, 당시 엄마는 아이큐가 높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고 하셨다. 그 말에 우리 모두 크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성적에 대해 잘했다고 칭찬하거나, 못했다고 야단친 적이 없었다. 두 분 모두 교사 출신이었는데도, 지금 돌이켜보면 어쩜 그리도 공부에 관심이 없으셨을까 미스터리하다. 


 예전에 오빠가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처럼 강압적으로 공부를 시켰으면 지금의 우리가 달라졌을까?"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현재 우리 삶은 달라졌을 수 있겠으나, 가족 간의 관계나 정서적인 부분은 지금도 같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엄마가 학업적인 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챙겨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나 역시 내가 자란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 나에게 '왜 공부를 더 시키지 않았냐고 원망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학업경쟁력을 쌓기보다는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인생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러운 발리사람들

 

 꾸따 비치의 파도를 보고 있으면 왜 발리가 서핑천국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처음 본 거센 파도가 조금 무섭다고 했지만, 바다를 바라만 봐도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나와 엄마는 연신 감탄을 했다. 가만히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걱정과 불안, 고민도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발리의 파도가 지금도 여전히 그립다. 바다 가까이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때도 가장 부러웠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나 고민이 있을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을 조금 더 말랑말랑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또다시 언젠가 한 번쯤 바다 가까이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커진다.


 지나가는 길에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맛있던 아이스크림이, 성인이 되니 별로 땡기지 않는다. 그때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아이스크림을 드시지 않았었고, 나는 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안 먹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도 그때의 나처럼 이해가 안 되는 눈치다. 엄마에게 이제야 그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한 뒤, 아이들에게 "너네도 크면 알게 될 거야."라고 하자, 모두 함께 크게 웃었다. 꾸따비치에서 일몰을 기다리며, 우리 가족은 나란히 모래 위에 자리 잡았다. 매일 이 석양을 바라보는 이곳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엄마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엄마 참 잘 만났다." 짧고도 간결한 그 말에 모든 사랑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양 속에서 그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벽했다. 엄마의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따뜻하게 울렸고, 그 순간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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