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이 바뀌어도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정교사로 와서 일해보지 않을래요?"
실습이 끝날 무렵, 원장님이 내게 건넨 말에 그땐 너무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내가 보육교사로 정말 일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이름 앞에 늘 붙던 건 '디자이너'였다. 기획서, 레퍼런스, 콘셉트, 디자인, 수정작업.. 그런 단어들 속에서 살아왔다. 중학교 3학년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고 패션 디자이너로 일을 하던 이모를 오랫동안 보면서 내 마음속에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꿈꿨다. 3년간의 입시 미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평생 디자인을 업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 이름표를 만들고 낮잠 이불, 젖은 옷을 담는 비닐봉지 그리고 손 소독제 냄새가 온몸에 풍기는 것이 내 일상이 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실습 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 깊었어요." 원장님의 마을 나는 오래 곱씹었다. 인상과 태도.
누군가에게 '실력이 좋다'가 아니라 '태도가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실력은 증명할 수 있지만, 태도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 보이는 것이니까.
그때 내 마음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나도 이제 어딘가에 쓸모가 있구나. 돈을 벌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몰렸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정말 여기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함께 왔다.
정교사는 단순히 아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이를 하루 종일 맡아야 하고, 그 아이의 하루를 안전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두려움이 크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 온전히 아이 둘을 잘 키워내야 하는 가장으로서 새 삶을 꾸려야 했고 안정적인 수입은 절실했다.
그렇게 나는 3살 반 담임이 되었다.
내가 일하게 된 어린이집은 시내에서 가깝지만 농어촌으로 구분되어 담임교사 한 반에 맡아야 할 아이들이 총 7명이었다. 서울 같은 대도시는 한 반에 5명인데 초보 교사가 어린이집에 처음 오는 7명의 아가들이 맞이한다는 것이 부딪히기 전까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3살 아이 7명은 작은 우주 7개였다. 각자 울음의 결도 다르고, 웃음의 이유도 다르고 좋아하는 촉감도 무서워하는 소리도 모두 달랐다. 7명의 하루는 7가지 기분으로 시작해 7가지 방식으로 변했고 그 변화를 온전히 다 받아내야 했다.
첫 담임이었던 나는 서툰 것 투성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아이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까 봐, 밥을 먹이는 속도도, 잠을 재우는 방식도 갈등을 중재하는 말도, 그 모든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서툼이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 마음이 정말 컸다.
그래서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했다. 강의에서 배운 것과 실전은 달랐기에 낮에는 틈틈이 선배 교사분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집에서는 발달과 영유아 보육 관련한 책과 자료를 더 깊이 파기 시작했다. 미술심리치료 관련 강의도 더 열심히 들었다. 내가 아이들을 잘 보살피려면, 단순히 "예쁘다, 귀엽다"로만 보면 안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 시기에 고르게 발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아이들의 울음은 성격이 아니라 언어였고 아이들의 행동은 버릇이 아니라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그 신호를 읽는 눈이 필요했다.
3살 반은 아이들이 엄마와 처음으로 길게 떨어져 원에서 생활하는 시기다.
처음 3개월은 정말로... 아이들이 많이 울었다. 아침 등원 시간은 매일 작은 이별이었다. 엄마의 손을 붙잡고 발버둥 치는 아이, 버스에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아이, 신발장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아이, 문고리를 붙잡고 우는 아이. 나는 그 울음을 받아내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건 단순히 괜찮아라고 다독이고 끝낼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정말로 이 공간이 괜찮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눈높이를 맞추고, 스킨십을 많이 해주고 아이가 적응하는 속도를 기다려주고 엄마의 부재를 '안전하게'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일.
그 과정에서 나는 매일 혼이 빠졌다. 오후가 되면 목이 쉬고 퇴근하면 다리가 풀렸고 밤이 되면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도 우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더 많이 않아주고 재미있는 놀이와 노래를 불러주며 하루하루 좋은 경험을 얻고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도 자립해 나가고 나도 교사로 적응해 갔다.
울던 아이들은 이제 웃으며 교시로 들어오고, 또 어느 날은 "엄마"라고 웃으며 뛰어들어왔다. 그 작은 변화가 내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의 성향을 관찰하고, 좋아하는 놀이를 기억하고 싫어하는 것을 존중하고 작은 성공을 크게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신뢰가 매일같이 쌓여갔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해맑았다. 그 해맑음은 내가 잊고 살던 감각을 깨웠다. 무언가를 만들 때의 설렘,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감탄하는 눈, 오늘이 어제와 다른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배웠다.
아이들과 함께 하며 나도 성숙해졌다.
어떤 아이는 말이 느리지만 무엇이든 기억을 잘했고, 어떤 아이는 예민하지만 손끝이 섬세하고 배려심이 넘쳤다. 낯가리는 아이지만 한 번 마음을 열면 끝까지 믿어주기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조금씩 자신의 강점을 쌓아가며 성장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성장은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다워지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맡았던 아이들을 그대로 데리고 4살 반 담임이 됐다. 아이들을 그대로 재담임을 맡는다는 건, 관계가 그대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계속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학부모님들이 그렇게 말해주셨을 때, 나는 마음 한편이 뜨거워졌다. 나를 믿어준 학부모님들, 원장 선생님과 동료 선생님들께 참 감사했다. 내가 엄마로서도, 교사로서도 흔들리던 시기에 "너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고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라고 말해주며 응원과 힘을 북돋아 주셨다. 이런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나는 미술심리상담사 자격증과 치료로써의 미술 강의도 꾸준히 들었다. 미술치료상담사로 일하는 이모에게 조언을 구하며 공부를 시작했고, 나의 아이를 위해서도 청소년 상담사 자격증 공부도 시작했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치유'라는 단어를 공부했다기보다 '이해'라는 능력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다.
이해는 사람을 살린다. 특히 말이 서툰 존대를 이해하는 건 더 큰 힘이 필요하다.
3~4살 아이들은 말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몸으로 표현한다. 불안하면 떼를 쓰고 두려우면 울고 답답하면 밀치고 사랑받고 싶으면 더 매달린다. 아이를 이해하는 능력은 곧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그 경험은 내 개인 삶에게도 더 깊게 연결되었다. 나의 첫째 아이가 두 돌이 되었을 무렵, 어린이집에서 발달이 다소 느린 것 같다고 발달 검사를 권유받았다. 그때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냥 느리다고만 생각하고 나이가 들면서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발달센터 두 곳에서 발달 검사를 했고 언어 발달과 신체 발달 일부가 느리다는 결과가 나왔다. 언어치료, 감각통합 치료 등을 받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말이 서투니 사회성이 부족했고 그로 인해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많아 원에서 전화가 오면 나는 늘 긴장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전화벨 소리는 내 마음을 쪼그라뜨렸다. 그때의 나는 배우자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나의 우울감과 아이의 발달 문제는 별개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삶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파도였다. 그래서 더 심리와 상담에 관심이 높아졌다. 단지 지식을 쌓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덜 힘들 수 있을지, 내가 덜 무너지고 단단하게 살아갈지, 내가 돌보는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고르게 발달하고 행복하게 자라날 수 있을지, 우리 삶이 조금 더 안정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었다.
그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은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겉'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안'에서 나온다는 것. 그 안은 상처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욕구일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순간, 내가 하는 일이 새롭게 보였다.
나는 브랜드를 만들어가는데 전체이자 일부를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브랜드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소비자의 행동을 바꾸려면, 소비자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내가 상담과 치료, 발달과 상호작용을 공부하며 얻은 것은 '사람의 내면을 읽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보육교사로 머물 수는 없었다. 다시 디자이너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백이 길어지면 감각이 무뎌질 것 같아 두려움이 커졌다. 그래서 원더앨리라는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나의 정체성을 담은 브랜드를 만들고 프리랜서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디자인 감각을 계속 익히기 위해 좋은 작업물을 보는 작업, 트렌드, 개인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낮에는 보육교사로 일했고 밤에는 디자인을 했다.
아이들이 잠든 뒤, 나는 다시 나를 꺼냈다. 노트북을 켜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외주로 받은 일을 하며 나라는 브랜드를 고민했다. 하루가 두 개로 나뉘었다. 낮의 나는 선생님이고 밤의 나는 디자이너였다. 이 두 역할을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살렸다.
과거 경험이 고스란히 자산이 된다.
미술입시를 3년 했던 경험과 디자이너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나는 아이들이 예술로 놀이하는 것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색을 고르는 감각, 재료를 만지는 경험, 손끝으로 표현하는 즐거움. 아이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면 고르게 발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교구를 고를 때도 활동을 준비할 때도 감각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보육교사 일에는 공무적인 서류 일이 정말 많았다. 관찰일지, 계획안, 평가, 부모 상담 기록 등 처음에는 그 많은 것을 처리하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그동안 회사와 사업을 하면서 이미 수많은 문서와 일정을 정리해 본 경험으로 의외로 빠르게 적응했다. 기획안을 쓰던 손이 관찰일지를 쓰고 있고 보고서를 만들던 눈이 아이들의 하루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업이 바뀌어도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디자이너에서 보육교사로 전환되었지만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결국 같았다.
1. 관찰 - 대상을 주의 깊게 보고 듣는다.
-디자이너 : 시장과 소비자를 관찰한다. / 보육교사 : 아이들의 행동과 감정을 관찰한다
2. 이해 - 행동 뒤의 맥락과 욕구를 파악한다
-디자이너 : 소비자의 불편과 욕구를 이해한다. / 보육교사 :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 단계를 이해한다.
3. 설계 - 더 나은 경험을 만들기 위한 구조를 짠다.
-디자이너 : 브랜드와 제품을 설계한다. / 보육교사 : 하루 일과와 놀이 활동을 설계한다.
4. 기록 - 과정과 결과를 문서화한다.
-디자이너 : 기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한다. / 보육교사 : 관찰일지와 평가를 작성한다.
5. 방향설정 - 다음을 위한 개선점을 찾는다.
-디자이너 : 피드백을 반영해 수정한다. / 보육교사 :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는 방향을 찾는다.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고 일의 본질은 같았다. 그때 남은 깨달음음 경력은 끊겨도 감각은 남는다는 것이다. 어떤 경험이든 헛된 것은 없고 고스란히 나의 자산으로 쌓인다. 경력은 끊길 수 있다. 직함도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얻는 감각은 남는다. 그 감각은 내가 다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단단한 밑거름이 된다.
나는 지금 멈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다시 시작하기 위한 숨을 고르는 과정이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쌓아온 경험 중,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혹시 그 경험이 여러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고유한 나의 자산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