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이들과 도망치듯 내려간 고향

고향에서의 휴식은 인생의 후퇴가 아닌 재정비

2018년 12월 나는 3살과 6살 아이 둘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트럭에 실린 짐은 많지 않았다. 7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며 짐을 줄이고 줄였다. 그동안 서울에서 쌓아온 것들이 고작 트럭 한 대 분량이라는 생각이 들며 허무함이 몰려왔다. 내 인생이 고작 트럭 한 대 분량으로 압축된 느낌이었다. 짐을 싸면서도 '이게 맞나'싶었다. 서울에서 쌓아온 커리어와 인맥.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친정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에서 도망치는 '후퇴'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나는 안쓰럽게 바라볼 것 같았고, 누군가는 실패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옆에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둘째는 잠들어 있었고 첫째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다. 결혼도 사업도 모두 끝났다. 손에 쥔 건 통장에 있는 돈 일부와 두 아이, 그리고 자존감이라곤 남지 않은 나 자신뿐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두려움. 역설적으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때문에 자유롭다는 해방감이라는 두 감정이 뒤섞인 채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나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과 회복이라는 것.


고향은 낯설면서도 친밀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목, 나를 아는 사람들과 무엇보다 나의 부모님이 계신 곳. 도망치듯 내려왔지만 그곳은 나와 아이들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죄송함과 감사함 사이


친정집에 도착했을 때 아파트 주차장 앞에서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어느 때처럼 반겨주셨다.


나는 내려지는 짐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이삿짐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춥다고 어서 들어가자고 말씀하셨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참았다. 아이들 앞에서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님 집이 하나 둘 나와 아이들의 짐으로 채워져 갔다. 나와 아이들의 짐이 가득한 비좁아지는 공간에서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같은 질문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내 짐을 받아주셨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은퇴 후에 행복한 노후를 보내셔야 하는 나이에 다시 딸과 손주 둘을 떠안게 되셔 경제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했다. 성공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는데 무너진 채로 돌아왔다. 이혼한 딸, 사업에 실패한 딸, 손주 둘 데리고 돌아온 딸. 부모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 그리고 동시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나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과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에 정말 감사함을 느꼈다. 부모님은 내가 무너진 이유와 상황에 대해 묻지 않으셨다. 그저 이제 좀 쉬라고 말씀하시며 천천히 새로운 곳에서의 아이들과 천천히 적응하며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 마디가 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첫 번째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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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감정과 마주하기


첫 일주일은 거의 누워서 보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동안에 쌓인 피로감과 우울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독박육아, 사업, 관계의 불화, 이혼 절차... 그 모든 것이 몸에 축적이 되어 있었고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이제 쉬어도 괜찮아'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누워 있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이런 상황까지 만들게 되었을까?'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더 잘했으면, 더 참았으면, 더 노력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싸웠던 장면들과 혼자 버텼던 밤들의 기억이 나를 짓눌렀다.


이런 구질구질한 나의 모습이 자책하며 역해질 때쯤, 이혼 전 방문했던 상담 선생님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은 약한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겁니다.


심리상담센터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의사 선생님의 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셨다. 나의 살아온 과정, 관계 불화, 사업 실패, 육아의 어려움 등을 쏟아내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 말하고 나니 선생님이 조용히 한 마디 하셨다.

"00 씨는 약한 게 아니에요. 너무 오래 버텨내신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계속 쏟아져내렸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약하고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믿고 배우자도 그런 나를 탓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동안 오래 참고 버텨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무너지기 전에 신호를 보낸다. 우울, 불면, 무기력..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몸에서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신호를 무시하고 참으려고 한다. 참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참는다고 상황은 괜찮아지지 않고 오히려 곪는다. 그리고 곪은 것은 결국 터진다. 지금 내가 바로 그 상태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었다. 상담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 나 자신을 아끼고 보듬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더 단단한 엄마가 되어 아이들에게 따뜻한 둥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이 시기도 잘 견뎌내고 아이들과 더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을 다독여갔다.



아이들의 새 출발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아이들의 일상도 정리해야 했다.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내가 어린 시절 다녔던 유치원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지인의 오래된 지인이기도 해서 그곳으로 보내게 되었다. 천주교 재단의 유치원이고 유치원 바로 옆에는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작은 성당이 있다.


30여 년 전 내가 뛰놀던 그 옛날의 모습은 조금 변경이 되었지만 그 건물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있었다. 유치원 앞에 서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뛰놀던 시간이었다.


'우리 아이도 여기서 그렇게 자랄 수 있을까?'

입학 원서를 제출하면 나는 기도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했다.

'제발,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세요.'

간절함 때문인지 기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첫째는 그 유치원에서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 새로운 곳에서 안정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둘째도 처음으로 문화센터도 다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 가득한 보사 핌을 받으며 적응해 나갔다.


가끔은 첫째가 왜 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지 묻는 날도 많았지만 2주에 한 번은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점 이 생활도 익숙해져 갔다. 아이들이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씩 안도했다.

적어도 아이들은 안전한 일상은 되찾았다.




나를 재설계하는 시간


아이들을 원에 보내고 나니, 본격적으로 '나'를 준비할 시간이 생겼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여성일자리 지원 센터였다.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걸 찾아보고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사는 내 상황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현실적으로 지방에서 디자인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취득하는 과정 동안 소정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 그렇게 컴퓨터활용능력 2급 과정을 추천받았다. 솔직히 처음엔 이런 자격증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3개월간 강의를 들으며 지원금을 받았다. 그리고 양육비 120만 원 중 60만 원은 고스란히 저축하고 아동수당과 남은 양육비 일부를 생활비로 사용했다. 아동학사를 취득하는 강의비와 기타 자격증을 충당하는 비용은 모두 재산을 분할하며 받은 돈에서 사용했다. 부모님께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나 자신도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하루라도 빨리 독립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보육교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온라인과 대면 강의를 병행하며 서울을 오갔다. 토, 일 연이어 듣는 대면 강의였기에 버스표를 끊고 새벽에 출발해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은 강의를 마저 듣고 다시 본가로 가는 날이 많았다.


힘들었지만 그 시간은 다시 나를 만드는 과정이었고 인생을 다시 재설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이혼 과정을 겪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상담과 심리에 관심이 생겼다.


'왜 관계는 이렇게 무너졌을까?'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반응했을까?'

'아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내 마음속의 질문들이 나를 심리학으로 이끌었다. 아동학 강의를 들으며 발달심리학 관련 내용에 더 깊이 몰두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미술치료에 눈이 갔다. 진지하게 심리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다 등록금 입금 전 포기했다. 지금 나에게는 가장으로서 일자리가 필요했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무리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치료로써의 미술학회의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


미술치료를 공부하며, 나는 나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의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시각화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를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나는 수업 외의 시간에도 나의 내면의 아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종이 위에 어린 시절의 나를 그려보며 다양한 나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한 귀퉁이에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원하는 걸 물어보지 않고 계속 참으라고만 했어. 네가 아프다고 말하는데도 괜찮은 척하라 가고 했어. 이제는 네 목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대로 해보며 살아보자."


편지를 쓰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절반을 참고 인내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한 번도 나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살아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모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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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회복하는 시간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은 우리 가족의 회복 공간이었다. 돈 들이지 않고도 따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아이들은 다양한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들이 읽을 책과 내가 읽을 책을 한가득 빌려서 돌아왔다.


나는 심리, 육아, 에세이, 재테크, 디자인, 브랜딩 등 정말 다양한 분약의 책을 읽고 필사를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마음과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독서는 가장 값싸면서도 다른 사람의 귀한 경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세상과의 연결이자 선생님이었다. 다시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 인생에 꼭 도움이 될 내용들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트에 내가 해야 할 목표들을 함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상처받은 아이들과 나의 마음을 위한 심리 관련 서적을 정말 많이 찾아서 읽었다. 아이들에게 학원은 보내줄 수 없지만 책은 원 없이 읽어줄 수 있었다.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지금에 생각해 보면 너무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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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비의 절반은 무조건 저축한다


부모님께는 정말 죄송했지만 나는 1년 동안 매달 들어오는 양육비와 양육수당 합산 금액의 절반은 저축했다. 취업이 된 후에는 월 200만 원씩은 적금을 넣고 나머지 금액에 맞춰 생활했다. 이혼 후 받게 된 양육비는 아이들을 위한 미래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쓰면 당장은 펴할 수 있지만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모아야 할 시기하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고 필요 없는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아이들 교육비와 의류비 등을 제외하고는 가진 돈 안에서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경제과 재테크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처음 부동산에 대해 알려준 친한 언니가 도서관에 가서 재테크 관련 한 책장의 책을 모두 읽어보기만 해도 할 수 있다 용기를 주었다.


마침 고향에는 나보다 먼저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친한 친구와 언니가 있었다.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공동 육아를 시작하며 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돈은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우리는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좋은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정보를 나누며 함께 버텼다.


혼자였다면 쉽게 포기하고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보육교사 실습과 예상치 못한 치유


드디어 보육교사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실습은 현장에서 아이들과 직접 부딪히며 교사로서의 생활을 경험하고 배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했고 미술심리치료 공부도 병행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접목해 아이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수업을 준비했다.


내가 실습한 원은 산에 위치해 있어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실습을 하던 시기는 가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낙엽을 주워 관찰하고 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꼈다. 아이들은 해맑고 순수한 생각을 나눴고 그 순간들 속에서 맑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얻었다.


한 아이가 낙엽을 들고 와서 물었다.


"선생님, 이 잎은 왜 색깔이 변했어요?"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면서 잎에 영양분을 주지 않아서 그래. 그러면 초록색이 사라지고 원래 가지고 있던 빨간색, 노란색이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겨울을 준비하는 거지"


아이에게 한 답변처럼 나도 지금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모습은 색이 변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봄을 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나무는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면 다시 꽃을 피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치유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작은 손으로 그림 그림, 웃으며 달려오는 모습들, 그 모든 순간이 나를 다시 살아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습이 다 끝난 뒤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선생님, 우리 어린이집에서 일해보시는 것 어떠세요?"

실습했던 어린이집에서 취업 제안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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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공간, 자기 이해 그리고 작은 도전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간 뒤에서야 깨달았다. 다시 일어서는 데는 순서가 있다. 무너진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안전한 공간이다. 나에게 그 공감은 부모님, 아이들 그리고 어린이집이었다. 그 안전한 공간이 나를 받쳐주는 안정망이 되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먼저 숨을 쉴 수 있는 공감을 찾아야 한다.


안전이 확보되고 나면 그다음엔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 온전히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심리 상담, 미술 치료, 심리 공부. 나는 이 시간을 통해 처음으로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상처를 마주하는 건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치유가 시작된다.


자기 이해가 쌓이면 그다음엔 작은 도전이 필요하다. 보육교사 실습, 자격증 취득, 미술학원 강사로 활동했던 것 모두 작은 도전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두려워도 괜찮다. 중요한 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도전들이 쌓여 취업이라는 큰 결과로 이어졌다.


고향으로 도망치듯 내려왔지만 그곳에서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싸웠다.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일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그날을 위해 싸웠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혼자서는 어렵지만 함께하면 문제를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상처를 마주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복은 어렵다는 것

-작은 도전이 쌓여야 큰 변화가 온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고향에서의 1년은 후퇴가 아니라 재정비였다.

돈을 모으고 시간을 배움으로 채우고 관계를 회복하며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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