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태현 Oct 08. 2020

<공포분자>에 내재된 진정한 공포

영화와 현실의 경계

<공포분자> 포스터(사진 : (주)에이썸픽쳐스)

영화를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 영화가 끝내 이끈 파국적 결말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무언가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결말로 나아가는 전개가 꽤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정념이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반복되는 우연성, 그리고 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연출. 어쩌면 영화는 작위적인 연출을 부각시킴으로써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하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내가 영화에 매혹된 순간은 파멸로 치닫는 과정과 그로 인해 남겨진 뜨거운 흔적이 아니라,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진작 흥미를 떨어뜨렸을 우연의 과잉에 있다. 작위성이 그 자체로 돌출해 영화를 균열 내고 생성한 기이한 틈새, 나는 이 간극이 <공포분자>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영화의 주요 서사에는 세 커플이 등장한다. 6명의 등장인물들은 주로 커플끼리 등장하는데, 커플들 사이에는 특별한 접점이 없고 그들은 각자의 테두리 안에 위치한다. 연결 지점 없는 인물들을 기어코 마주하게 하는 것이 영화의 전반적인 태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작위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은 영화가 그들을 억지로 붙이려는 행위와 별개로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세계가 일치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는 서로가 공존할 수 없다거나 소통이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분명 서로를 응시하고 서로에게 리액션을 하지만, 영화가 그들을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분명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담아내는 숏과 리버스 숏 간에는 그들을 단절시키는 벽의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벽으로 인해 근본적인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가 그들의 만남을 담아내기 위해 선택한 형식들에 대해 살펴보자. 사진가인 창(첫 번째 커플 중 남)은 집 밖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따라 슈안(세 번째 커플 중 여)이 있는 곳에 도달한다. 그는 경찰에 쫓기는 슈안과 대순을 사진에 고스란히 남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진을 찍는 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피사체인 슈안만 담겨 있고 그 바깥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피사체의 대응 지점, 창이 찍고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음을 애써 보여준다. 어딘가로 떠나는 슈안의 뒷모습이 화면에 잡히고 이를 촬영하는 듯한 셔터음은 들리지만 창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그곳엔 사진을 찍는 행위만 지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련의 시퀀스에서 영화는 그들을 하나의 숏에 담아내지 않는다. 그들은 숏에 의해 떨어져 있고 서로의 공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공포분자> 포스터(사진 : (주)에이썸픽쳐스)

그들의 만남은 분명히 실재했다. 창이 찍은 슈안의 사진들이 증거이다. 창의 여자 친구 또한 그들의 만남을 증명한다. 그녀는 수많은 그 사진들을 본 뒤 슈안(의 사진)에 집착하는 창에게 화를 내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때 의미심장한 숏이 등장한다. 여자 친구가 분노해 집안 물건을 정신없이 던지다가 창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데, 창은 연기처럼 그 장소에서 사라지고 없다. 베란다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커튼만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번 창의 사라짐은 슈안을 찍다 사라진 것과 결이 다르다. 여자 친구가 베란다로 나가 밑을 바라보면 유유히 걸어가는 창의 모습이 잡힌다. 셔터음만 남긴 채 사라진 이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약간의 시간만 편집됐을 뿐 창은 이내 시야에 잡힌다. 그러니까 해당 숏은 점프 컷으로 이해된다.


(떠난 직후의 신을 조금 잘라낸다면) 그가 여자 친구를 떠나 향한 곳은 슈안과 처음 만났던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서 슈안을 다시 마주한다. 첫만남과 달리 이제 그는 그녀와 한 숏에 담겨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기까지 한다. 문제의 점프 컷 이후부터 영화는 마치 창이 슈안의 세계로 진입한 것처럼 두 인물을 한 공간에 담아낸다. 점프 컷은 단절된 두 세계의 진입문으로서 기능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세계는 일치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진정한 교감에 실패한다. 그 실패의 경험은 그들의 단절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는데, 그 원동력은 그들 안에 증폭된 고립감이다. 그들의 실재적인 만남은 결합하면 안 되는 물질들이 만나 폭발을 일으키는 화학반응처럼 보인다. 영화가 여태 그들을 단절시킨 이유가 이러한 위험성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기어이 그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영화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공포분자> 포스터(사진 : (주)에이썸픽쳐스)

극중 소설가 주울분(두 번째 커플 중 여)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그 말을 처음 들을 땐 수긍하며 지나칠지 몰라도 그 말이 반복되는 순간 어떤 의구심이 떠오른다. 정말 허구는 허구일 뿐일까? <공포분자>에 등장한 위험한 인물들, 즉 위험 분자들의 결합들은 영화의 허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들의 파국이 인위적인 상호작용인 만큼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영화는 결국 스크린 바깥 현실의 문제로 이어진다. 창과 슈안의 세계처럼 영화와 현실은 그저 단절된 세계인가? <공포분자>는 분절화된 세계들 간 결합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영화는 가로막는 벽의 경계를 허물고 벽의 존재를 재사유하도록 배치돼있다. 


<공포분자>는 대만 뉴웨이브의 흐름을 선도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초기작품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공포분자>를 통해 대만 사회의 도시화를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현대사회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대만 뉴웨이브의 또 다른 선도자인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가 조용한 롱테이크를 통해 현대 사회의 인간성을 유심히 바라본다면, <공포분자>는 함께 섞일 수 없는 이미지들의 충돌을 통해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한다. 그로써 영화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스크린 밖 현대인들의 정체성을 다시금 묻고 있다. 대만 뉴웨이브의 굵직한 파동은 <공포분자>와 함께 꿈틀대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전영화 스케치> 파리넬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