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의 비극을 통해 ‘욕망’과 ‘결핍’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서사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동생 파리넬리를 거세한 리카르도의 행동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를 통해 예술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개인의 욕망에 희생된 파리넬리의 결핍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집중한다.
파리넬리는 천상의 목소리라 불리는 고운 미성을 가졌지만, 남성성을 상실당한 비극적 인물이다. 관객으로 온 여러 여자들을 사로잡지만, 진정한 관계로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남성성의 결핍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형은 이에 책임을 느끼고 동생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려 한다. 그는 동생의 아내인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의 씨를 제공하여 아이를 잉태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그렇지만 이는 동생을 카스트라토로 만든 행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 파리넬리의 욕망과, 이를 채워주려는 형의 욕망은 알렉산드라를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든다. 그녀는 파리넬리와 달리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했어요”라는 말로 그녀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변호하듯, 형제와 다른 여자 간의 정사를 두 번에 걸쳐 보여준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진행된 상황임을 가장함으로써 문제를 덮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알렉산드라와는 결이 다르다. 영화는 그녀들을 순간의 욕망에 이끌린 모습으로 담았다면, 알렉산드라는 아이의 잉태를 돕는 희생적 모습으로 담아낸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이를 대변한다.
파리넬리의 거세, 알렉산드라의 잉태는 욕망에 의해 희생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두 상황을 다르게 제시한다. 영화가 거세 장면을 생략한 것과 다르게, 알렉산드라의 정사 장면은 그대로 노출한다. 잠에서 깬 형이 그들의 침대에 도착하고 암묵적으로 정사를 나눈다. 파리넬리가 그녀에게 이해를 구하고 대화하는 장면은 생략돼있지만, 그녀가 희생당하는 장면은 여실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다음 영화
한 사람의 아픔을 세심히 표현하려 한 영화지만 다른 한 사람의 아픔엔 무감하다. 두 인물에 대한 상반된 시선은 영화가 제시한 해결책에 스스로 균열을 낸다. 파리넬리의 결핍은 희생 없인 충족되지 못할까?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개인의 욕망은 정말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