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무의식 - 2
저는 85년생으로 200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재수를 하여 2005년도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생소한 규칙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현역으로 입학한 학생과 재수로 입학한 학생은 같은 나이로 취급을 하여 서로 말을 놓아야 했고, 삼수로 입학한 학생부터 +1살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즉 재수로 입학한 저는 현역으로 입학한 동기들과는 친구 관계가 되었으며, 삼수를 해서 입학한 동기와는 형(누나) 동생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85년생 또는 빠른 86년생 현역으로 입학학 04학번 선배님은 형, 누나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서로 말을 놓게 된 86년생들과는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데 반해, 형 또는 누나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쓰게 된 선배님들과는 나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반면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서로 나이가 같으면 쉽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숫기가 없어 쉽게 다가가지 못했음에도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먼저 친구를 하자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저는 2011년 대학 졸업을 한 직후 27살에 미국의 한 대학병원으로 한 달간 연수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 담당 교수님은 당시 40대 초반의 나이였는데, 저는 당시 미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교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교수님이면 Professor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Professor라는 호칭은 너무 길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Sir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길고 어려운 이름 앞에 Mr. 를 붙여 불러야 하는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호칭을 찾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절 보자 먼저 본인을 Tony라고 소개하며 그렇게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Tony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닌 애칭 같은 느낌이었고, 저는 교수님을 그렇게 격식 없이 부르는 것이 적지 않케 당혹스러웠습니다. 실제로 저와 실습을 같이 하는 미국 학생들이 교수님을 Tony라고 편하게 부르는 모습을 본 후 저도 마음을 놓긴 했지만, 그래도 Tony라는 이름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한동안 호칭을 생략한 채 손을 들고 Excuse me.라고 한 후 제 용건을 꺼내곤 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의과대학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그만큼 높으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교수님과 회진 일정을 같이 돌면서 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몇 차례 목격했습니다. 병동 간호사님이 회진을 돌고 있는 교수님을 Hey Tony라고 불러 세우며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업무적인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농담과 일상 대화까지 편하게 주고받는 모습은 위계질서가 강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이후 차츰 미국의 호칭에 적응한 저는 교수님을 Tony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저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변화를 발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교수님들과 대화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것이 위축되고 어렵게 느꼈었지만, 미국의 Tony는 훨씬 편하게 느껴졌고, 개인적인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어 영어 실력이 부족함에도 제가 맡은 발표 또한 자신감 있게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어와 심리적 거리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여왔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브라질리언 주짓수라는 운동을 배우면서 저스틴이라는 미국인 친구를 사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보다 10살가량이 많았는데도 저와 격의 없는 친구로 지내며 같이 운동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러 다니거나 집에 초대를 받는 관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나는 일이 있는데 하루는 제가 평소 먹던 1000mg짜리 비타민 C를 씹어먹어 보라며 Justin에게 건넨 적이 있습니다. 그 약을 씹으면 시다 못해 쓰게 느껴지는 알약인데 저는 그러한 장난을 칠 만큼 Justin과의 관계를 친근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반면 10년 넘게 같이 운동을 한 형 동생들과는 비록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저스틴과는 다른 거리감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를 제가 해오던 운동에 대입해보면 마치 룰에 따라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복싱과 주짓수의 거리감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도복을 입고 하는 기(Gi) 주짓수에서는 도복을 잡을 수 있는 약 50cm의 거리에서 상대와의 교전이 시작되어 그라운드 상태에서는 서로 밀착되어 게임이 진행되는 반면, 복싱에서는 상대의 주먹이 닿을락 말락 하는 1m 내외의 거리에서 싸움이 지속됩니다.
격투기에서의 룰이 상대와의 물리적 거리를 만들 듯이 언어의 차이가 사람 간의 심리적 거리를 만듭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한국어의 존칭법은 단순한 거리감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계급 또한 만든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저를 형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쓰는 동생이 있는데, 하루는 미국인 친구와 셋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눌 일이 생겼습니다. 형이라는 존칭어와 존댓말이 제거된 후 서로 you라고 부르는 관계가 되자 저는 그 동생과의 수평적 거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수직적 거리 또한 제거되어 동등한 관계가 됨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는 다시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형으로써 동생에게 보여야 할 제 모습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친구와 같이 동등하고 친근한 관계에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끝난 후 다시 형 동생의 관계로 돌아오자 저는 다시 멀어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존칭어와 존댓말이 대인 관계를 위축시킬뿐더러 위계질서 안에 종속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적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타인과 교류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의 고하 여부와 관계없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어의 대인관계에서는 늘 무의식적으로 상대와 자신 간의 서열정리를 먼저 해야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주짓수와 같이 취미생활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먼저 나이를 물어 형 동생을 정하는 과정을 겪어왔으며,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직책을 높고 낮음에 따라 한쪽은 존댓말을 쓰고 한쪽은 말을 놓는 관계가 형성되곤 하였습니다. 제가 사회에 나온 이후로 느끼는 것은 나이도 같고, 사회적 지위도 같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설령 나이나 사회적 지위가 우위에 있더라도 저는 말을 놓고 상대는 말을 높이는 관계가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생각한 한 가지 방법은 저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무조건 저는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저 또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이 성공한 점은, 나이가 적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대에게 존댓말을 써주자 그 사람들이 저에게 더 많은 의견 개진을 활발히 해준다는 점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지위의 고하에 따른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느꼈고 즉, 수직적 거리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존댓말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수평적 거리는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친밀하고 격의 없는 관계를 만들려 해도 서로 말을 놓는 친구처럼 친밀해지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한국어의 존칭 법과 존댓말을 고수한다면, 이러한 심리적 거리는 극복하기 힘든 문제일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깊은 무의식적인 문제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징어 게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기훈이 상우에게 "그게 나였어도 밀었을 거냐?"라고 묻는 장면에서 상우는 기훈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하... 씨발, 아, 기훈이 형!!!... 형 인생이 왜 그 모양 그 꼴인지 알아? 지금 이 상황에도 그런 한심한 질문이나 하고 자빠졌으니까! 오지랖은 쓸데없이 넓은 게 머리는 존나 나빠서, 씨발, 똥인지 된장인지 꼭 처먹어봐야만 아는 인간이니까!"
상우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욕설을 내뱉고 모욕적인 말을 반말로 하면서도 기훈에게 '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상우의 무의식은 기훈이 아무리 못나고 답답한 존재여도 나이에 따른 서열관계를 깨는 행위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무의식에 나이에 따른 서열관계가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어 더빙에서는 시종일관 상우가 기훈을 'Gi-ho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한국인이 한국어로 느끼는 기훈과 상우의 관계를 영어로 온전히 번역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피터 파커의 숙모인 메이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영어로는 "May no!!!"라고 외치지만, 한국어 번역은 "숙모 죽지마요!!!"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것은 그 혈연적 관계와 관계없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친밀감에 따른 심리적 절망감을 보여주지만, 상대를'숙모'라고 규정짓는 순간 우리는 둘 사이의 혈연적 관계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정신과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한국어의 존칭법과 존댓말이 관계의 수직적 서열을 만들고, 이를 통해 상호 간에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침범하도록 만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존중받기를 원하며, 언어적으로 무시를 당하는 경험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상대에게 원한을 품거나, 상대를 해칠 수도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형성되게 합니다. 저는 주짓수에서 복싱을 할 수 없고, 복싱에서 주짓수를 할 수 없듯이, 언어에 의한 심리적 거리 문제는 언어적 환경을 변화시켜야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제가 시도했던 방법을 넘어서 상호 간에 존중을 할 수 있는 사회적인 언어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