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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Oct 07. 2021

Goodbye, LA!

Los Angeles (17.08.13 ~ 17.08.19)

  깜깜한 밤이었다. 고소공포증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었다. 이 무거운 캐리어도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급하게 준비했던 첫 여정이라 내 것을 장만할 새도 없이 아빠한테 빌린 녀석이었다.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없이 평범한 이 무채색의 캐리어가 이후 계속되는 나의 수많은 여행길 동지가 될 운명이었음을. 눈을 들어 앞을 보니 반가운 얼굴들이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단돈 400달러만 들고 떠났던 내가 무사히 고국의 땅을 다시 밟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레이'는 교수님과 연이 닿은 UCLA의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지난 방학에 교수님의 연구를 도우러 잠깐 한국에 왔었고 나와는 그때 몇 번 얼굴을 본 게 다였다. 이런 우리를 이어준 교수님의 활약이 없었다면 내가 언제 UCLA의 기숙사에서 1박을 해볼까? 새카맣고 육중한 철창으로 된 문이 열리고 아늑하게 꾸며진 방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레이는 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곧 있을 시험을 대비해 밤새 공부를 해야 한다며 편안하게 쉬다가 가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혼자 남은 나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머물다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아기자기한 가정집처럼 생긴 세모 지붕 기숙사들이 쪼르르 늘어서서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것 같았다.


  오후 5시 5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니 꽤나 여유가 있었다. 공항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지금 가장 보고 싶은 곳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다시 와도 여전히 아름다운 산타모니카의 해변이었다. 이번에는 공항이 있는 남쪽을 향해 지난번보다 더 멀리 걸어볼 생각이었다. 캐리어 때문에 발로 모래를 느껴볼 수는 없었지만 파도소리를 들으며 포장도로 위를 걷는 것도 꽤나 운치 있었다. 조금 걷다가 배가 고파지자 벤치에 앉아 서브웨이에서 산 샌드위치를 뜯으며 한적한 이곳 풍경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녹화했다. 특히 모래사장 바깥 나무둥치를 베개 삼아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어폰을 꽂은 채 여기저기서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로움을 부러운 눈으로 담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이곳 사람들은 주위의 시선이나 상황을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자가용이 보편화된 나라인 만큼 교통량이 많아 버스를 이용하면 시간적으로 상당히 손해를 보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연착이 밥 먹듯 벌어지는 버스를 타고 교통체증이 가득한 도로를 달려도 한국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빨리 가려는 운전기사의 시도나 늦지 않을까 초조해하는 승객들의 다급함은 보이지 않았다. 버스로 이동할 때마다 늘 시계만 들여다보며 짜증 가득한 얼굴이었던 나 자신이 어느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 도시에서 풍기는 여유가 좋았다. 나중에 노년이 되어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가 오게 된다면 이 산타모니카의 해변에서 긴 휴가를 보내고 싶어졌다.


  한없이 이어진 모래사장을 따라 걷다 보니 온갖 볼거리에다가 별의별 일들이 다 생겼다. 머슬 비치(Muscle Beach)에 조성된 야외 헬스장에서 우락부락한 몸을 자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침구류 주위로 동물처럼 영역표시를 하는 노숙자, 나에게 "Are you Japanese?"라고 물어오는 자전거를 탄 유학생, 그리고 자신들의 앨범에 내 이름을 적어주며 강매를 시전하는 거리의 래퍼들까지. 특히 이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처음 당하는 일이기에 너무 무서워서 횡설수설하다가 겨우(?) 2달러를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CD에 들였을 자본을 생각하면 값을 너무 싸게 치른 건가 싶었지만 사실 그들의 사정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통쾌하기도 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렇게 어느덧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다. 끝날 듯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의 모래사장 덕분에 예상보다 한참을 더 걸었지만 이 정도는 그동안 겪은 고생에 비하면 문제 축에도 못 끼는 수준이었다. 가볍게 비웃어 주고는 떨어진 당 충전을 위해 인 앤 아웃(In-N-Out)에서 밀크셰이크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입안에 퍼져오는 쨍한 달달함에 쌓인 피로가 녹아내리면서 힘이 솟는다. 그 많던 우여곡절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고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유독 선명해졌다. 그날도 오늘처럼 산타모니카의 해변을 한껏 만끽한 하루였다. (정확히는 LA 3일 차 되는 날이었다.)




  전시장에 포스터를 걸고 학회에 참여한 다른 연구실의 포스터들도 둘러보며 다소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바람을 쐬러 나선 길이 무려 1시간을 넘게 걷는 뻘짓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미국의 석유 부호가 세운 아름다운 미술관, 게티 센터(The Getty Center)에 가겠다고 구글 지도에 'Getty'만 검색한 탓에 아무도 가지 않았을 'Getty View Park' 꼭대기에 발도장을 찍었다. 다시 내려와 주저앉은 정류장 벤치에서 길 건너편에 크게 보이는 게티 센터라는 글자에 그나마 남은 힘까지 몽땅 빠져나가는 기분이란. 마감시간이 다 되어 들어섰기에 급박하게 움직이던 나와는 상반된 미술관 안팎의 사람들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언젠가 나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표정을 지으리라 다짐했다. LA를 다시 방문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첫 해외 방문은 아니었지만 나 홀로 감당해야 했던 첫 해외여행임은 분명했다. 시작은 미숙했으나 그 끝에서 해외도 국내여행과 별다를 게 없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우려와는 달리 알뜰살뜰히 남긴 현금으로 누린 소소한 공항 기념품 쇼핑이 가장 기뻤다. (물론 운이 좋았다.) 언제 또 비행기를 타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다음'이 더 기대되는 이유는 이미 '처음'을 경험했기에.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심정이 썩 나쁘지 않은 까닭은 또 다른 여정을 기약한 사람에게 주는 특혜였을까? 어쨌든 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박 7일 미국 LA 여행 발자취》


1일 차 (17.08.13)
인천 국제공항(ICN) | LA 국제공항(LAX) > 다저스타디움 > UCLA

2일 차 (17.08.14)
라 브레아 타르 피츠 & 뮤지엄 > 파머스 마켓 > 더 그로브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 그리피스 천문대

3일 차 (17.08.15)
산타모니카 > UCLA > 더 게티 센터

4일 차 (17.08.16)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 > 할리우드 왁스 뮤지엄 > 파머스 마켓

5일 차 (17.08.17)
LA 자연사 박물관 > UCLA

6일 차 (17.08.18)
산타모니카 > LA 국제공항(LAX)

7일 차 (17.08.19)
인천 국제공항(I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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