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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Oct 24. 2021

프라하의 겨울

Prague (18.01.19 ~ 18.01.22)

  사실 운이 좋았던 것 말고는 딱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새해가 되자마자 태풍 엘리노아가 유럽 전역을 휩쓸더니 이번엔 눈 폭풍 프레데릭이 연달아 들이닥친 것이다. 그 틈새의 고요한 순간을 노려 평온하게 체코 땅을 밟았기에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으로 가득한 여행길을 걷게 된 것이 오히려 나은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너 자신을 알라.'와도 같은 옛 격언을 몸소 느끼게 해 준달까?


  이런 기막힌 날씨 상황에도 다행스러운 결과가 있었다. 마침 프라하에서 교환학생을 다녀간 아는 동생이 쏠쏠한 여행 팁을 몇 가지 일러준 것이었다. 그중 가장 큰 수확이 보조배터리 구매였다. 어제 숙소로 돌아오기 전 동생이 알려준 팔라디움(Palladium) 백화점에 들러 이 소중한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안도의 미소를 짓는 사이 눈발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트램(Tram)에 올라탔다. 점차 하얗게 덮여가는 신비스러운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금방이라도 마법사와 기사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은 거대한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프라하 성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마주한 성 비투스 대성당의 거대함을. 아무리 뒷걸음질 쳐도 카메라 화면에 전체 모습이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하늘 끝으로 솟은 장벽이 나를 덮쳐오는 듯한 위압감마저 들었다. 이렇듯 외관만으로도 엄청났지만 입장권을 사서 들어온 내부는 더 장관이었다. 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천장을 가진 광활한 예배당과 그 벽면을 수놓은 영롱한 스테인드글라스, 3층까지 이어진 파이프 오르간까지. 종교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성당들을 보았지만 이곳만큼 큰 충격을 준 장소는 없었다. 아마도 처음이 가져다준 강렬한 자극이었으리라.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퍼지는 종소리에 맞춰 걸으며 성 비투스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관광안내소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프라하 성의 여러 관람코스에 따라 다양한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딱히 사전에 준비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그냥 성내 거의 모든 곳을 돌아볼 수 있는 A코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유럽여행 내내 든든하게 날 도와준 조력자가 등장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직 졸업식을 하지 않은 대학원생 신분을 활용해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아 둔 것이다. 덕분에 350코루나(한화로 약 18,000원 정도)짜리 티켓을 절반 가격인 175코루나에 살 수 있었다. 가난한 대학원생을 배려해준 유럽의 많은 나라에 진심 어린 감사함을 표하는 바이다.


  이제부터는 또다시 자유로운 방랑자가 될 시간이었다. 성 안 시설들이 옹기종기 붙어있어 실내 공간을 따라 쉽게 눈을 피할 수 있던 것도 한몫했다. 이곳에서 난 왕족이 되어 구왕궁을 활보해보고 기사가 되어 다양한 무기 중 맘에 드는 걸 고르기도 했으며 사제가 되어 예배당에 앉아 기도도 드려보았다. 그러는 동안 두꺼웠던 회색 눈구름은 흩어지고 어제 본 쨍한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프라하 성의 정원에서 바라본 시내의 모습은 마치 블록으로 지은 세트장 위에 흰 설탕을 뿌린 것 같았다. 이런 예쁜 건물들을 길가에 스치는 돌이나 잡초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유럽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금강산도 식후경이었다. 반짝이던 프라하 경치를 보며 느낀 찬란한 감정을 고이 품은 채로 한 식당에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는 아는 동생이 일러준 꿀팁대로 스비치코바(Svíčková)와 흑맥주를 시켰다. 카페 루브르(Café Louvre)라는 이름의 이 식당은 실제로 카프카와 아인슈타인이 자주 찾던 단골 가게라고 한다. 정말 그들이 여기를 왔을까 의심도 들었지만 확실한 건 추천받은 스비치코바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음식이었음에도 정말 맛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스를 끼얹은 소고기에 빵과 잼, 크림을 곁들여 먹는 체코의 대표 음식이라고 한다. 이공계를 전공했고 먼 미래에 작가를 꿈꾸는 나로서는 하늘 높은 두 선배와 음식으로 연결된 사실이 그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별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걸 보니 흑맥주의 취기가 제법 올라온 모양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짙은 어둠도 이 도시의 화려한 조명을 뒤덮을 수는 없었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의 밤은 낮과는 또 다른 색의 매력을 선사했다. 이런 야경을 매일 볼 수 있는 프라하 사람들이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아주 천천히, 차곡차곡 공을 들여 두 눈에 담긴 모든 장면들을 머릿속 기억장치에 욱여넣었다. 이제 내일이면 보지 못할 테니까. 지난 LA에서도 느꼈지만 너무도 아름다워서 사진으로 담을 생각조차 못하는 공간들은 늘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제 또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이대로 프라하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는 것은 이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는 동생이 일러준 마지막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겨우 찾아 들어간 재즈 리퍼블릭(Jazz Repub-lic)은 벌써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한 테이블은 무대에 발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맨 앞자리였다. 재즈 공연은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옆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앉으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같은 걱정은 연주가 시작되니 눈 녹은 듯 사라졌다. 그저 일렉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 드럼의 4중주가 만들어내는 즉흥연주와 이름 모를 맥주 몇 잔이면 되었다. 낭만 가득한 프라하의 겨울밤은 재즈 선율을 따라 흐르며 그렇게 저물어갔다.


《3박 4일 체코 프라하 여행 발자취》


1일 차 (18.01.19) - 유럽 1일 차
인천 국제공항(ICN) |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SVO) |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PRG) > 글로리아(Gloria) 호텔

2일 차 (18.01.20) - 유럽 2일 차
구시가지 광장 >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 레넌 벽 > 카를교 > 바츨라프 광장 > 무하 박물관

3일 차 (18.01.21) - 유럽 3일 차
프라하 성 > 성 비투스 대성당 > 카페 루브르 > 하벨 시장 > 카를교 > 재즈 리퍼블릭

4일 차 (18.01.22) - 유럽 4일 차
플로렌스(Florenc) 버스터미널 | 스타디온(Stadion) 버스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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