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18.01.22 ~ 18.01.24)
운동과는 담을 쌓은 나였지만 아이스 스케이트는 제법 타는 편이었다. 어릴 때 종종 버스를 타고 옆 동네 아이스링크에 가서 빙판 위를 달리곤 했다. 아득히 오랜 예전임에도 몸은 여전히 그 감각들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머나먼 타국에서도 날개를 단 듯 은쟁반 위를 활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행의 가장 긍정적인 요소는 그 시간을 직접 겪기 전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분명 좋은 쪽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 그 도시의 조각 같은 시청 건물 앞에서 계획에도 없는 스케이트를 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 혼자만의 행보도 아니었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기에 그 나름의 재미가 쏠쏠했다.
프라하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 역시 창 밖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거대한 기마상과 함께였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프라하에서도 '한달살기'가 유행이라던데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과 훌륭한 치안을 자랑하며 물가도 나쁘지 않은 도시였다. 긴 여행의 첫 발자취부터 '만'과 '족'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긴 채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로 약 5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인 만큼 출발 전 화장실은 필수였다. 10코루나, 우리나라 돈으로 약 500원 정도의 적은 금액이 그다지 쾌적하지 않은 화장실인데도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든다. 여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돈이 제일인 걸까?
내가 예약한 스튜던트 에이전시(Student Agency)라는 버스는 쾌적한 좌석에 개인 TV가 달려있고 화장실까지 갖춘 장거리 이동에 최적화된 수단이었다. 프라하 시내를 빠져나오자 대부분이 숲인 길들이 계속 이어졌다. 딱히 잠도 오지 않아 그저 무념무상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내 유일한 관심사는 체코와 그다음 목적지인 오스트리아의 국경이었다. 살면서 두 나라의 국경을 달리는 차로 통과해본 일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구글 지도로 타이밍을 재다가 이때다 싶은 순간 매의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떠한 특별함도 찾을 수 없었다. 유독 국경에 민감한 나라 사람이기에 뭔가 큰 의미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 반이 넘어서야 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라하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전과 교통권 구매가 우선이었다. 이번 여정에서 체코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이 모두 유로화를 사용했기에 넉넉히 바꾼 뒤 새 도시 탐방을 시작했다. 대중교통이 발달된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교통권 사용법은 프라하와 동일했는데 어떤 수단이든 처음 탈 때 기계에 넣고 날짜와 시간을 펀칭(Punching)하면 그로부터 유효기간까지 무제한 환승이 가능한 구조였다. 때문에 전략을 잘 짜서 구매해야 돈을 아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경험해 볼 한인민박이었다. 일종의 게스트하우스 같은 곳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오로지 한국 사람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보통 여러 사정으로 현지에 살고 있는 호스트가 운영하는데 각종 여행정보와 푸짐한 한식이 제공되며 의지할 곳 없는 여행자들끼리 의기투합할 수 있는 거점이 되기에 인기가 많은 숙박 형태였다. 국내에서부터 혼자 또는 여럿이 떠나는 여행을 번갈아 즐겨온 만큼 이번 유럽여행도 호텔과 한인민박을 적절히 섞어보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운이 좋다면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살포시 담아서.
지하철을 내린 후로는 호스트 님이 보내준 지도와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다소 난해한 위치의 숙소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무사 입성에 성공했고 운이 좋게도 때마침 도착한 다른 숙박객들과 시간이 맞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나를 포함한 남자 둘, 여자 둘이 한 조가 되어 오스트리아의 야경을 구경하러 출발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는 빈은 아기자기한 매력의 프라하와는 상반될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가 있는 도시인 줄 진즉 알았더라면 일정을 더 길게 잡았을 것이다.
화려한 볼거리만큼이나 먹거리도 다양했다. 립(Rib)과 슈니첼(Schnitzel)이야 워낙 유명한 음식들이고 여기에 송어 살을 튀긴 겉.바.속.촉.의 요리가 곁들여졌다. 덕분에 이날 빈을 방문한 이후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다양한 생선살 요리들을 주문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 모든 음식들이 다 성공적이었다. 그러니 유럽에 가면 잊지 말고 꼭 생선요리를 주문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또 하나 되새겨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이곳의 음식점 문화였다. 일단 한국처럼 주문이 늦어질 때 "Excuse me!"와 같은 말로 재촉하는 것이 큰 실례라고 한다. 보통 처음 손님을 받은 직원이 서빙부터 계산까지 그 테이블을 모두 책임지므로 다른 직원들에게 요청을 해도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테이블을 전담해준 직원에게는 팁을 남기는 것이 또 하나의 문화다. 팁을 주지 않으면 그 직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표현이기에 주의해야 한다. 어쩌면 급한 성격의 한국인과는 맞지 않는 문화가 동유럽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오해를 낳은 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체코부터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내게는 전부 친절한 이들뿐이었다. 이 모든 만남이 좋았던 게 전부 우연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