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18.01.22 ~ 18.01.24)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이라는 장르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문학이 그렇고 연기가 그러하며 음악이 그랬다. 그중에서도 미술과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 두 연인이 나누는 키스가 내게는 한없이 잔잔하고 되려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던 이유가. 구스타프 클림프(Gustav Klimt)의 생애와 작품관을 아는 이라면 그가 얼마나 많은 욕망을 이 그림 속에 녹여냈는가를 주목했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사랑받는 것에 만족하는 여인의 표정이 진하게 밀려왔다. 사실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 정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캔버스 위에서 그랬듯 나 역시 내 맘이 이끄는 대로 감정을 몰아갈 뿐이었다.
지난밤 스케이트를 타며 조금은 어색함을 덜어낸 일행들과 오전 일찍부터 숙소를 나섰다. 흐린 하늘에 다소 쌀쌀한 기온까지 더해져 입김으로 손을 녹여야 하는 날씨였지만 호스트 님이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서인지 우리의 걸음걸이에는 거침이 없었다. 빈 소년합창단에 입단한 아드님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이미 이곳 잔뼈가 굵은 호스트 님은 우리에게 알짜배기 코스를 추천해 주셨다. 겨울에만 경험할 수 있는 시청 앞 스케이트는 이미 원 없이 즐겼다. 이어지는 오늘 목적지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재력을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두 궁전, 쇤브룬(Schonbrunn)과 벨베데레(Belvedere)였다.
지하철로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쇤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름 별궁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좌우로 길게 뻗어 한 앵글에 담기조차 힘든 노란 외관의 건물 안에는 무려 1400개가 넘는 방이 있는데 이것도 당초 계획보다 축소된 규모라고 한다. 이 방들 중 일부를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배경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알차게 구경할 수 있었다. 수많은 방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기에 어제의 아이스 쇼로 인한 피로가 겹쳐지면서 이미 두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렇게 건물 뒤편으로 터덜터덜 빠져나온 우리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쇤브룬 궁전 뒤편에 자리한 거대한 정원과 그 끝 언덕에 솟은 글로리에테(Gloriette)라는 이름의 고풍스러운 구조물, 그리고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까지. 말도 안 되는 규모에 압도당해 조금 걸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만 뻐끔뻐끔 쳐다보던 일행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그만. 이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스스로를 그저 운 좋게 취업에 성공한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여자 두 분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료 선생님이었고 남자 한 분은 ROTC 임관을 곧 앞두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일면식도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던 네 사람이 우연이라는 시간의 마술 속에서 한 무리가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다섯 명으로 늘어 있었다. 이 역시도 우연의 산물이었다.
무거워진 두 다리를 이끌고 겨우 도착한 벨베데레 궁전은 쇤브룬과는 또 다른 매력이 돋보였다. 완벽한 좌우대칭의 정원을 사이에 두고 상궁과 하궁이 마주 보는 공간미도 단연 압권이었지만 진짜 가치는 그 내부에 있었다. 개인 소유의 저택이었던 이곳을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사들였을 때 소장하던 수많은 미술작품들도 같이 넘어오면서 벨베데레 궁전은 온전히 지금과 같은 미술관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전시 목록에는 구스타프 클림프, 에곤 쉴레(Egon Schiele)와 같은 유명 화가의 명작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덕분에 아픈 다리도 쉬어 갈 겸 멈춰 선 자리에서도 눈앞에 걸린 클림트의 키스(Liebespaar: 연인)를 한도 없이 마음껏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넷에서 다섯이 된 뜻밖의 만남은 벨베데레의 한 전시관에서 일어났다. ROTC 친구가 정말 우연히도 자신의 동기를 마주친 것이다. 유럽여행 중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는데 하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그것도 벨베데레의 상궁 미술관 안을 걷다 마주칠 줄이야. 게다가 알고 보니 두 선생님도 빈으로 오는 같은 버스 안에서 마주친 사람이라며 놀라워했다. 결국 오늘 이렇게 같이 다닐 운명이었던 걸까? 새 일행을 환영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모두가 지쳐 있었다. 재빨리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맥주와 오스트리아의 국민음료라는 알름두들러(Almdudler)로 회포를 풀며 기력을 회복하고는 2차로 'Vollpension'이라는 카페에 방문했다. (이 역시 호스트 님의 추천이었다.)
할머니 얼굴이 그려진 간판을 찾아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한 뒤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꽃피우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 다가온 한 할아버지께서 신나서 떠들고 있는 우리에게 관심이 가는 듯 어떻게 이 카페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으셨다. 이미 치즈케이크 맛에 푹 빠진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며 여기가 한국에서도 유명하다며 분위기를 띄웠고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고 보니 간판 속 주인공인 할머니의 남편 분이셨고 이곳의 음식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이라 맛이 좋다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자기 직업에 이런 자세로 임하는 사람이 주위에 과연 몇이나 될까? 아직 입사한 회사 문턱도 넘지 못한 나로서는 직장인이 된 내 모습이 어떨지 한없이 궁금할 뿐이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이벤트는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Viener Staatsoper)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과 더불어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로 불리는 곳이었다. 당연히 방문해서 그 유서 깊은 장소를 눈과 귀로 한껏 감상하는 게 맞겠지만 현실적인 벽이 있었다. 일단 복장부터 격식을 차려야 하고 가격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상연되는 공연이 만들어진 나라의 언어로 불리기에 내용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물론 자리 곳곳에 영상으로 영어해설을 틀어주지만 어려운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오페라를 경험해보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가장 추천하는 방법이 바로 제일 꼭대기층에서 볼 수 있는 3유로짜리 입석 티켓을 끊는 것이다. 부담 없는 가격인 만큼 오페라의 초반부만 맛보고 지루해질 즈음 나오면 되니까.
오늘의 오페라는 감격스럽게도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의 카르멘(Carmen)이었다. 어릴 적 피아노를 조금 배웠던 내가 좋아하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카르멘에 나오는 하바네라(Habanera)였다. 그 첫 라이브 무대가 빈 오페라하우스라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다만 그 감상 환경이 쾌적하지 못한 건 꽤나 아쉬웠다. 입석은 말 그대로 지정 좌석이 없기에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 까치발로 무대를 들여다봐야 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미리 가서 한쪽 난간에 목도리를 둘둘 감아 두었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무대 쪽으로 몰리면 자리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공간이었다. 아쉽지만 주인공 카르멘이 돈 호세를 유혹하는 1막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나머지 2, 3, 4막의 뒷이야기는 언젠가 제대로 된 자리에 앉아 온전히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운명을 가장한 우연한 동행을 끝으로 우리 일행은 다시 넷이 되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침대에 죽어 있던 나는 게스트하우스의 공용공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살포시 눈을 떴다. 짧지만 강렬한 효과의 수면은 다시 움직일 에너지를 보충해주었고 그렇게 방을 나와 일행들과의 수다로 마지막 밤을 불태웠다. 곁들여진 한국식 컵라면과 맥주는 덤이었다. 프라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감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탈바꿈시켰다. 으레 하는 것처럼 한국에 돌아가면 연락하자는 작별인사를 끝으로 침대에 다시 누워 생각했다. 이 여행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