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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May 01. 2023

빗속을 뚫고 달리는 무한열차

투어러블메이커 - 구마노 고도, 꿈 많던 너로

  잠들 의도는 없었다. 여태껏 환히 켜진 천장 불빛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간단히 씻고 나와 수화물로 부칠 배낭에 넣으면 안 되거나 혹은 기내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보조가방에 옮겨 담는다. 오랜 여행 경험에서 만들어진 루틴이 숨 쉬듯 공항까지 이어진다. 수화물 수속 때 슬쩍 배낭 무게를 보니 10.5kg이 찍힌다. 도보 순례를 할 때 권장하는 배낭 무게는 자기 몸무게의 10분의 1. 저리 보여도 65kg인 토마가 6.5kg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수치다. 배낭 속 등산화와 스틱을 빼면 훨씬 더 가벼워질 거란 기대를 가져본다.


  발권을 마치고 출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다. 엄청난 인파를 마주하니 비로소 그 망할 코로나가 종식된 게 실감이 난다. 이어지는 나주곰탕 먹방. 계속 감기는 눈을 뜨기 위해 억지로 밀어 넣다 보니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소화도 시킬 겸 이어지는 면세점 구경.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술이다. 특히 중국 출장을 다녀온 뒤로는 그렇게 고량주 가격을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잠깐의 기다림. 비행기에 타자마자 토마는 안대부터 쓰고 잠을 청한다. 일단 자야 했다. 거짓말 안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내릴 준비를 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진정한 의미의 눈 깜짝할 새.




  비행기에서 빨리 내리려고 최대한 앞자리를 고른 토마. 하지만 입국 수속장으로 가는 전동차에 가장 먼저 오른 탓에 내리는 순서는 그 반대였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 게다가 수속을 진행하는 직원이 하필 이곳에서 가장 꼼꼼한 사람인 걸까? 토마는 자신이 서있는 줄이 가장 천천히 줄어드는 게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그제야 잠이 깬 몸이 생체 신호를 보내온다. 결국 화장실까지 다녀오니 일본땅을 밟은 지 어언 2시간이 다 돼서야 간사이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비 내리는 공항선. 히네노 행 열차에.


  오늘 묵을 곳이 있는 기이타나베 역까지 기차로만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다. 다행히도 환승할 열차가 곧 도착이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발권기를 아무리 검색해도 기이타나베 역이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바보같이 ‘기이-‘를 ‘KII-‘가 아닌 ‘KI-‘로만 검색한 탓이었다.) 부랴부랴 역무원에게 직접 표를 끊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난 후였다. 다음 기차는 한 시간 뒤. 오늘의 목적지인 다나베 시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고 번거로운 아침 비행기까지 예매해 가며 벌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아 진이 빠진다.


  괜히 별명이 ‘투어러블메이커’일까? 문제없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이 토마에겐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삶이 곧 여행인 사람에게 여행 속 문제들은 당연히 행해지는 삶의 일부이니까. 이왕 이렇게 됐으니 주어진 한 시간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일단 배가 고팠다. 무거운 배낭에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간 역 근처 평점 좋은 타코야키 집은 아직 영업 전이었다. 이 마저도 안 도와주시나? 잠시 후 토마는 플랫폼 벤치에 앉아 퍼붓는 비를 바라보며 치킨 한 조각과 슈크림이 가득 들은 초코빵을 먹고 있었다. 어째 어제부터 계속 편의점을 전전하는 것 같다.


  몇 차례 경험했지만 일본의 편의점 계산 방식은 늘 낯설다. 화면을 보며 직접 현금을 넣는 시스템. 게다가 오늘은 점원덕에 계산하려는 금액 보다 더 많은 잔돈을 넣어 불필요한 동전을 처리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친절한 일본 사람들. 쾌적한 기차에 오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이제 내일이면 매일 인터넷으로만 찾아보던 구마노 고도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여행의 테마송을 고민하던 토마에게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얼마 전 개봉한 극장판을 본 뒤 정주행을 하며 눈물을 펑펑 쏟게 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의 주제가. 「새벽 별(明け星)」.


  웅장한 사운드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니 열차 뒤쪽에서 당장이라도 ‘염주’가 튀어나와 칼을 휘두를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의 끝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감상에 젖어든다. 그 사이 기차는 한적한 시골역에 멈춰 섰다. 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들른 관광 안내소. 이곳에서 구마노 고도 순례길의 스탬프를 모을 수 있는 순례자 여권을 챙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이 가리비인 것처럼 이 길의 상징은 세발 달린 까마귀, ‘야타가라스(八咫烏)’다. 그 문양이 새겨진 첫 스탬프를 찍으며 토마는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체크인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그 틈에 이 마을 명소로 알려진 ‘텐진자키(天神崎)’에 들를 요량으로 역 내 짐 보관함에 배낭을 두고 나선다. 하지만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빗줄기 때문에 우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도케이 신사(鬪雞神社)’. 작지만 고즈넉한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두 번째 스탬프를 찍었다. 앞으로 크고 작은 무수한 신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매일 마주하다 보면 무뎌지는 것은 당연하기에 지금만 느낄 수 있는 이 ‘처음’이라는 특별함에 집중하면서 경내를 거닐었다.


  아쉬운 마음에 버스 정류장을 조금 서성거리다 예약해 둔 숙소로 들어선다. ‘장고(DJANGO)’라는 이름의 바와 같이 운영하는 위치 좋은 게스트 하우스였다. 분명 일본인은 아닌, 국적이 서양 어딘가로 추정되는 호스트의 안내를 받아 오늘 몸을 누일 침대를 배정받았다. 입구에 벗 우(友) 자가 적힌 나무 향 가득한 방이었다. 다시금 일본이란 나라의 깨끗함을 자각하게 된다. 샤워를 마치고 바로 내려온 토마는 호스트에게 저녁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여기는 음식 가짓수가 적다며 현지 식당 한 곳을 추천해 준다. 싸고 맛있단다. 그리고 그 말은 진짜였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내일 아침으로 먹을 삼각김밥을 샀다. 하나는 명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어다. 내일 아침 일찍 버스를 타야 하기에 지금 당장 출발이 가능하도록 미리 짐을 쌌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누우니 온몸이 살짝 뜨거운 게 느껴진다. 비를 맞아서일까? 아니면 아까 저녁을 먹을 때 마신 맥주의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는 걸까? 날짜를 세어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다. 토마는 계획한 대로 잘 걸을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의 미션》

1. 오전 5시 공항 샌딩 서비스 픽업 (O)
: 싸지 않은 가격에도 이 숙소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늦지 않게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차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 같은 시간 서비스를 예약한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먼저 탑승해 있었다. 덕분에 늦지 않고 편안하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2. 종합 감기약 사기 (O)
: 토마는 어제 짐을 쌀 때 한 가지를 빠뜨렸다. 비상약 중에 하필 종합 감기약이 없었다. 이미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지만 계속 깜빡했다. 천만 다행히도 공항 내 약국이 있었다.

3. 간사이 와이드 패스 교환 (O)
: 교통비가 비싼 일본 여행에서는 다양한 패스를 활용하는 게 이득이다. 알아보니 토마가 머물 기이 반도를 이동하는 JR기차노선은 간사이 와이드 패스 이용이 가능했다. 다만 5일권이기 때문에 8박 9일 일정 중 시작 날짜를 선택해야 했다. 어차피 초반 일정은 첫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걸어 다닐 예정이었기에 5일이 남았을 때 사용하기로 정했다. 한국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구매해 둔 QR코드를 가지고 간사이 공항역에서 실물 티켓으로 교환하는 데 성공했다.

4. 구마노 고도 안내 센터 들르기 (O)
: 구마노 고도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장소. 순례자 여권과 버스시간표 그리고 각종 순례길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달리 순례자 여권은 공짜였고, 토마는 순례길 완주인증서와 상관없이 모든 스탬프를 찍을 생각이었기에 두 개를 챙겼다. 마지막으로 내일 출발할 버스 시간과 정류소 위치까지 완벽하게 확인했다.

5. 텐진자키 관광 (X)
: 토마는 거센 비바람을 떠안고 낯선 동네의 해안가를 찾아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여행자의 대원칙.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아쉬움은 늘 여행과 동행하는 것이기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해야 할 이유를 하나 남겨둔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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