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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티카 Sep 07. 2021

여기에도 사람이 있어요,
당신만큼이나 아름답고 외로운

매드연극제 인터뷰 ep.6

글 이철승
사진 이철승




창작집단 ‘A.3355’의 문문 디렉터



“너는 왜 남자가 되고 싶은 거야?”
“나는 남자가 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남자야.”


트랜스젠더 남성의 성장기를 담은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 「나단이라고 불러줘」에 나오는 대화입니다. 

안티카의 ‘매드 연극제’에 올려진 A.3355의 창작극 ‘최후 인간의 몸이 말해볼게, 프랑켄슈타인은 들어’에서는 이 그래픽 노블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사실 ‘최후 인간의 몸이 말해볼게, 프랑켄슈타인은 들어’에 직접 관련된 책이 있습니다. 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이나요. 혹시, 극의 제목에서 눈치를 채셨나요? 네, 「최후의 인간」과 「프랑켄슈타인」입니다. 두 권 모두 19세기 영국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쓴 공상과학소설입니다.


문문: 자신의 몸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희가 그분들에게 「최후의 인간」과 「프랑켄슈타인」를 읽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어요. 그 대화를 담은 게 극의 3개의 파트 중에 첫 번째인 ‘A 파트’에요. 


그런데 18세기를 배경으로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쫓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와 21세기 말에 역병으로 인류가 절멸해가고 있는 아포칼립스 세계에 남겨진 최후의 인간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창작극을 준비한 A.3355의 문문 디렉터가 답변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답변이 한마디로는 나오지 않을 테니 조금씩 천천히 따라와 주세요.




괴물을 위한 변명


문문: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프랑켄슈타인」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괴물’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적어도 그러한 취급을 받을 때가 있죠. 


흔히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괴물(creature)’을 창조한 물리학자의 이름입니다. 괴물은 이름이 없었죠.


문문: 소설에서 사람들이 괴물을 보면 놀라서 소스라치거나 역겨워하면서 도망가곤 하거든요. 외모만으로 괴물을 판단하면서 쫓아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해요. 그 때문에 너무 외로운 존재가 되었고, 그래서 박사에게 친구를 만들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잖아요.


확실히 지금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 소설 속 괴물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문문: 하지만 메리 셸리 작가는 기본적으로 괴물에 연민이 있었어요. 박사보다 괴물이 하는 말이 더 아름답고 설득력도 있거든요.


작가가 주인공인 박사가 아닌, 괴물을 위한 변명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멀지 않습니다.


문문: 작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또 잃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했던 어머니이기도 했지만, 또 여성 작가를 경시했던 탓에 처음에는 자신을 이름을 감추고 출간해야 했던 여성이기도 했어요. 19세기 여성의 지위가 소설 속 괴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


「프랑켄슈타인」으로 메리 셸리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그녀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53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 10년 가까이 뇌종양으로 고통받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네 명의 아이 중 세 명을 모두 어려서 잃었습니다. 문문은 작가의 불행했던 삶이 여러 작품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문문: 「최후의 인간」은 메리 셸리 작가가 1818년에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 이후인 1826년에 출간했어요. 그 사이에 작가는 남편을 선박사고로 잃었어요. 「최후의 인간」을 출간하지 전이죠.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가까웠던 시인 바이런까지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어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그 때문인지 「최후의 인간」에서 역병으로 인류가 모두 죽어가는 암울한 아포칼립스 세계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스토리가 종말을 다루고 있을 뿐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에요.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기본적으로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남아있어요.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네. 우리 스스로가 먼저 바라야 해. 우리가 사는 이곳이 천국이 되기를 말이네. 인간의 의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죽음의 화살촉도 무디게 만들 수 있고, 질병이 머무는 곳도 위로할 수 있으며, 크나큰 고통의 눈물을 닦아낼 수도 있다네.’ - 「최후의 인간」


문문: 「최후의 인간」과 「프랑켄슈타인」의 공통점은 작가가 인물의 내면묘사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거예요. 또 인간을 닮은, 그러나 인간이 아닌 괴물이라는 존재와 인류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과정을 통해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해요.




성별이 없는 하늘의 별처럼 


‘최후 인간의 몸이 말해볼게, 프랑켄슈타인은 들어’는 어느새 안무가 이어지는 ‘B 파트’에 다다랐습니다. 


문문: 안무가분께 한 주문은 딱 한 가지였어요. 괴물이 되어서 그 심정을 표현해달라. 혐오와 편견이 가득 담긴 시선을 버텨내면서 내가 누구인지 계속 설명해야 하고 또 스스로 질문하게 되는 심정이요. 


그런데 그러한 괴물의 마음을 담은 안무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문문: 관객 반응 중에서도 예민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표현되어서 좋았다는 말이 가장 반가웠어요. 괴물의 내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아름답게 보이길 바랐어요.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만, 그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내면은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최후 인간의 몸이 말해볼게, 프랑켄슈타인은 들어’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메리 셸리의 소설들처럼요. 


문문은 창작극의 메시지를 특정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문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하기보다 그냥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거든요.


다만, 이번 안티카의 ‘매드연극제’에 무대에 올리면서 꼭 전하고 싶었던 한 마디를 극의 마지막 대사에 모두 담아보았습니다.


 “저 별에도 성별이 있을까?”


문문: 저 사람은 남자, 저 사람은 여자, 혹은 저 사람은 무엇 무엇이다, 이런 식으로 꼭 정의하는 과정이 왜 필요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징검다리


최후와 괴물을 얘기하는 줄 알았던 ‘최후 인간의 몸이 말해볼게, 프랑켄슈타인은 들어’는 결국 아름다운 이미지와 해피엔딩을 남기고 끝을 맺습니다. 


문문: C 파트에서 두 사람 사이에 징검다리가 놓이고 손을 잡게 되는 과정은 상징적인 것이에요.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방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손을 잡기를 바랐어요. 그 누구라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요. 밖으로, 거실로라도 나오길 바랐어요. 그래서 징검다리도 놓고 손도 내밀었어요. 모두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해져서 거리에서 가까이에서 지나쳐도 서로를 못 알아볼 수 있지만, 어느 한순간 함께 한 같은 종족이 있을 거라고 다독여주고 싶었어요. 


징검다리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건너 건너 드디어 만난 두 사람. 어렵게 만나 드디어 손을 잡은 그들은 이제 어두운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섰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도 손을 잡아줄 준비가 되어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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