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도시 파리.’ 직접 가보기 전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었다. 하지만 파리에 처음 가기 위한 여행 계획을 세우며 그 곳에 100개가 넘는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도착하여 여러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는 그 규모와 그림에 놀라며 파리에 붙은 수식어의 의미가 비로소 실감이 났다.
파리에 오래 거주하는 게 아닌 여행 목적으로 가는 사람이 그 곳에 있는 모든 미술관에 가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방문할 미술관을 신중하게 선택한 기준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명한 곳,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예술가의 미술관. 그래서 나는 루브르와 오르세, 로댕 미술관과 들라크루아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퐁피두센터에 갔다.
모든 미술관이 각기 다른 이유로 좋았다. 루브르나 오르세는 그 명성만큼 방대한 역사와 여러 사조의 그림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로댕 미술관과 들라크루아 미술관처럼 한 사람의 작업을 모아 놓은 미술관은 한 예술가의 생과 예술을 집중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유명한 미술관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서 아주 조용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경험 중 하나였다. 야외 정원에서 날씨의 변화를 느끼고 봤던 그림을 조용히 되짚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혹은 그림과 상관 없는 생각을 하며 단지 앉아서 공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까지도.
파리는, 파리의 미술관은 참 아름다웠다. 계속해서 영감을 건드리고 자극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한 예술가의 작업물을 하나의 공간에 오롯이 모아놓은 미술관을 다녀 오면 그런 기분이 더했다. 마치 그가 아직도 여기 살아있는 것처럼, 생과 예술은 작품 안에서 영원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이 너무 좋아서 파리에 다녀온 후로 나는 그 곳을 종종 그리워했다. 그 곳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미드나잇 뮤지엄>에는 총 아홉 개의 미술관과 소장된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방문했던 미술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가보지 못 한 곳에 대한 정보도 궁금하여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림을 사조나 시대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도시와 미술관에 따른 분류로 큐레이션한 책은 그때의 기억을 톺아볼 수 있다는 점이 새로운 것 같다. 볼 때는 잘 몰랐던 작품 이야기를 알 수 있어 유익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로댕 미술관이다. 작품 자체도 좋지만, 규모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 작품을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것도 다시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다. ‘생각하는 사람’을 비롯한 그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그 전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공간의 분위기도 한 몫 했다. 로댕 미술관 공간 자체가 넓고 아늑한 정원에 딸린 저택이어서 로맨틱한 그의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레의 시민’이나 ‘지옥의 문’처럼 역사나 고전을 주제로 한 작업 외에도 사랑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은 유리창 건너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볼 때 정말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대리석, 36*71*53cm, 1890년, 로댕 미술관
작품명인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 속 다나오스 왕의 딸들을 일컫는 말이다. 다나오스 왕이 받은 신탁 때문에 그의 딸들은 남편들을 죽여야 했고 그 죄로 평생의 형벌을 받게 된다. 작품명과 그에 딸린 이야기와 몸짓은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론 형태적 아름다움은 눈부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로댕의 오랜 연인이었던 카미유클로델을 모델로 한 작품인데, 이 미술관에서는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중년>을 볼 수도 있다. 로댕과 그녀의 이야기이면서 중년이라는 시기 자체를 은유하듯 담아낸 아름다운 작품. 이처럼 로댕 미술관에는 로댕 한 사람을 둘러싼 중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품이 함께 있다.
오르세와 루브르 미술관은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사람도 너무 많아서 사실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기억에 남았던 그림들을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웠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캔버스에 유화, 315*668cm, 1849~1850, 오르세 미술관
귀스타브 쿠르베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색조도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든다.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단지 색조 뿐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주제와 묘사된 사람들의 얼굴 표정 때문이기도 하다.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그리라고 말하는 자는 내 눈앞에 천사를 데려오라”는 사실주의 화가로 잘 알려져있다. 그가 사비로 ‘사실주의관’이라는 전시장을 만든 것이나, 직접 ‘사실주의 선언문’을 작성하여 나눠주었다는 일화는 그가 화가로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그림의 주제로 삼고자 했던 의지와 열망을 잘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의 장례식이 역사화나 종교화처럼 큰 캔버스에 그려졌다는 것이 당시에는 비판받을 이유였을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의 죽음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이 있을까? 질문할 수도 있겠다.
파리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로부터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더 좋았다”는 말을 몇 번 들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어떻게 둘을 비교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루브르는 소장한 작품 수가 워낙 방대하기도 할 뿐더러 ‘대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루벤스의 그림 같은 큰 규모의 작품이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10년 5월 13일, 생드니에서 거행된 마리 드메디시스의 대관식>,
캔버스에 유화, 394*727cm, 1621~1625년, 루브르 박물관
가로 7m가 넘는 크기의 그림 근경에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원경에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여러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에 ‘그려져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신화나 역사화의 경우에는 그 이야기를 화가는 붓으로 ‘기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지. 아주 큰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 눈빛, 손가락과 몸짓, 그들이 입은 옷의 주름 등은 매우 섬세하다.
루부르에 걸린 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점점 그 크기와 작품수에 압도되어 그림들을 제대로 다 들여다보지 못하고 다음 작품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에 바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장이라도 제대로 보려고 하면 이내 그 완성도와 깊이에 빠져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그림과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동의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화가 각자가 내고 싶었던 하나 하나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리는 그림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수단으로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비평가들이 인상주의에 혹독한 비평을 퍼부은 심정을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화가들이 이전의 그림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겠다는,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이유들도. 내가 느낀 루브르와 오르세의 차이는 그런 것이었다.
고전 미술을 관람한 다음 퐁피두센터에 갈 때 발걸음은 가벼운 편이었다. 아무래도 현대미술은 밀도가 높고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그림보다는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복합 쇼핑몰 같은 퐁피두센터에 들어서면 사람이 워낙 많고 공간이 웅웅거리는 편이어서 컨디션에 따라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에서 다시 만나 반가웠던 작품은 이브 클랭의 작품이다.
이브 클랭, < SE71, 나무, 커다란 푸른 스펀지>,
스펀지, 석고, 순수안료, 합성수지, 150*90*42cm,1962년, 퐁피두 센터
퐁피두에서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색의 분위기나 형태가 신기하여 꽤 오래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자기만의 파란 색인 이브클라인블루IKB를 만들었다는 정도였지만, 이브 클랭이 30대에 단명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가 유도를 했고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도.
색은 화가에게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단지 형태를 구분하고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수단이 아닌, 색 자체가 하나의 주제로써. 색과 사람의 마음, 감정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색만을 집중적으로 쓴다면 그 의미는 더 강해진다. 이브클랭이 여러 색을 써보고 ‘액체 상태일 때나 말랐을 때 그 성질에 구애받지 않고 균일한 밝기와 농도를 유지하는 울트라마린 색, 모든 기능적 정당화로부터 해방된 파랑’이라고 어떤 색을 명명하는 과정은 그에게 어떤 자유를 맛보게 해주었겠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책에 실린 곳 중에서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은 다음에 파리에 간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바로 라울 뒤피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
라울 뒤피, <전기 요정>,
합판에 유성 페인트, 1000*6000cm, 1937년,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파리전력공사가 특별히 의뢰해 탄생했다는 이 그림은 제목에도 ‘전기’가 들어가있다. 특히 관람객을 둘러싸는 모양으로 걸린 작품의 전시 형태가 흥미롭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 <수련> 연작도 마찬가지인데, 그림이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걸리는지도 관람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작품 크기나 빛을 담은 형형한 색채를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방대한 크기만큼 담고 있는 요소도 다양한데, 이 그림에는 총 110명의 과학자와 발명가, 지식인과 함께 신화속 인물이 등장한다고 하니 그 모습과 묘사를 뜯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 ‘작은 미술관’이라 소개된 마르모탕 미술관과 귀스타브 모로 박물관에도 꼭 가보고 싶다. 사실 막상 미술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 인터넷을 일일히 검색하고 정보를 얻기란 조금 피곤한 일이다. 그럴 때 이렇게 책 한 권에 잘 담긴 양질의 정보는 유익할 것 같다. 잘 간직하고 있다가 다시 파리에 갈 때나 궁금한 게 생길 때, 필요할 때 꺼내 보아야겠다.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감정은 기이했다. 나는 혼자였고, 행복하지도, 무엇에 대한 큰 기대가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단지 ‘그림을 보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이자, 평범한 여행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침 여덟시, 아직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전인 꽤 한산한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이 파리를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그저 완전히 꾸며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영화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도시라는 것을. 이건 애써 만들어진 분위기도 아니라는 사실을.
예술이라는 누군가에게는 꽤 허황되고 누군가에게는 꽤 낭만적인 이 단어가 파리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동력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증명하기 어려운 단지 느낌일 뿐이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건물 구조나 디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짐작하는 건 여기에 머물다 간 아주 많은 예술가들의 숨이 곳곳에는 붙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숨결이 미신적인 것이 아닌 물질적인 것으로써 살아서 영향을 주고 그것을 느낀 게 아닐지, 의심되지 않고 믿어졌다. 그 숨을 찾고 연결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누군가로 인해 그 열망 또한 계승된 탓으로, 처음 방문한 사람도 무시할 수 없는 도시의 분위기란 것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며. 이건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는 파리라는 도시의 숨결이다.
**이 리뷰는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https://www.artinsight.co.kr/) 의 문화초대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