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LOVE & JAZZ 전시 리뷰 - 아티스트북을 중심으로
마티스, 마티스, 마티스. 그 이름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몇 번은 있었다.
색감 연구를 위해 그의 그림을 모작했을 때, 유튜브에서 우연히 그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고도 희망을 노래한 작가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 재작년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컷아웃 기법 작업 위주로 구성된 그의 전시를 보았을 때, 올 초 모네의 그림을 보기 위해 방문한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게 그의 커다란 판화 작업을 보았을 때.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미술이란 숲에 한 발 들여 놓는 사람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나 자료는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다는 걸 알게 되는 경험이 이어졌다.
그는 내 삶에 꾸준히 반복하여 이야기를 만들기를 시도하는 작가였다. 그런데 이 이상 어떻게 더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미술가는, 그의 살아가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빚어낸 작품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던 나의 어떤 욕구나 마음을 발견하게 해주곤 하여 그 미술가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단순히 지식적 앎을 획득하는 것 이상으로 거리를 좁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마티스는 아직 그 문 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아직은 그의 작업에서 내가 발견해야 할 무엇을 찾지 못했거나 구체화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앙리 마티스, LOVE & JAZZ’ 전시를 찾았다.
단지 봤던 그림을 새로운 마음으로 봐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마티스 작업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그가 여러 문인과의 협업을 통해 만든 아티스트북과 삽화 작업이었다. 이 작업들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지금 내가 가진 질문과 문제에 실마리와 해답이 되어줄 것 같은 단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북이란 텍스트에 미술 작품 원본 그림을 함께 엮어 만드는 책이다.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파리 미술상들이 유명 작가들에게 협업을 제안하며 시작되었고, 193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도 한창 인기를 끌었다. 마티스도 시집, 소설 삽화, 잡지 등 여러 형태로 아티스트북 제작에 참여했다.
파리의 유명한 석판 공방 무를로에서 작업 된 ‘아폴리네르(Apollinaire)’는 시인 루베이르와 마티스가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기욤 아폴리네르를 기리며 만든 아티스트북이다.
‘비하인더 미러(Derriere le miroir)’는 마그 갤러리에서 열린 마티스의 두번째 드로잉 전시의 도록이며 마티스의 인물 석판화 원화가 들어 있다. 이러한 아티스트북에 수록된 판화는, 미술품 원본이란 가치를 그대로 지니면서도 에디션을 여러 장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무겁고 비교적 고가여서 소장하기 어려웠던 유화가 가진 아쉬움에 대한 대안적 기능을 했다.
또한 마티스는 1937년부터 1974년까지 제작된 예술잡지 ‘베르브(Verve)의 편집자 테리아드와 일찍이 연을 맺고 교류해 왔다. 테리아드는 1939년에 컷아웃으로 잡지를 꾸밀 것을 먼저 마티스에게 제안했는데, 마티스가 1941년 수술을 하게 되고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본격적으로 컷아웃 작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화다. 그는 열두 달 동안 20장의 컷아웃과 그의 글을 엮어 <재즈>를 작업한다.
베르브의 편집자이자 평론가였던 테리아드에 관한 정보가 인상적이어서 집에 돌아와 더 찾아봤다. 그는 마티스뿐 아니라 피에르 보나르, 조르주 브라크,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동시대 여러 예술가와도 교류했던,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평론가였다. 그래서 예술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 즉 잡지 지면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당시는 미술품 원본에 대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유형의 잡지 발간을 시도했고, 이런 사람들의 노력과 애정으로 아티스트북 제작은 계속될 수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1922년 발표한 소설 ‘율리시스'의 삽화 작업 방식은 이 자체로 하나의 또 다른 소설 같다. 마티스는 그의 소설을 읽지 않고 삽화 작업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마티스의 삽화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념과 다양한 인물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삽화가라면 텍스트의 분위기를 반영해 작업해야 할 것 같은 통념을 뒤집는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효과가 더욱 매력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찾아보니 마티스는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의 ‘오디세이’를 읽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아예 관계없는 그림을 임의로 붙인 것은 아니었다.
반면 스테판 말라르메와 작업할 때 마티스는 직접 편집을 맡아 시를 고르고 삽화를 그렸다. 시 원문이 따로 전시돼 있진 않았지만, 제목과 그림으로 시 분위기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가령 ‘여름날의 슬픔', ‘내가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사람', ‘이 머리칼은, 극단에 이른 불꽃의 비상', ‘씁쓸한 휴식에 지치고' 등 시 제목에서 풍기는 어떤 이미지는 마티스가 자유로운 단선으로 그려낸 낭만적인 그림과 정말 잘 어울렸다.
이렇듯 여러 삽화와 아티스트북으로 작업된 그의 작업은 그의 그림에 관해 자주 말해지던 것이 내게 정체된 것으로 다가올 때쯤 새로운 각도로 그의 작업을 바라보며 한 번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는 좋은 그림, 좋은 작업을 해내는 것 자체에 관한 목마름이 컸다면 요즘엔 그다음을 더 생각하는 시간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좋은 작업으로 결국 하게 되는 것'이랄까.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문장 그대로다. 내게 이야기가 있어서 그것을 말하는 매체로 그림을 선택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다음엔 그것으로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의 도착지는 그러나 출발지와 같다. 작업으로 하게 되는 것은 되돌아 그 작업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일테니.
나의 지금 이 때에 마티스 전시 관람은 그의 그림을 그저 바라보는 일을 넘어서, 당시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할 수밖에 없었던 아티스트북의 탄생 과정과 동시대 편집자와 평론가, 예술가들이 교류했던 방식 등을 한 덩어리로 이해하며 그의 행보를 새롭게 목격한 현장이 되었다. 이로써 앞의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에 관한 질문에 답할 작은 단서를 발견한 느낌이 든다. 삶이 어떤 변화를 겪을 때 이런 직관과 느낌을 더욱 날카롭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래야 그 다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어떤 그림은 혼자만이 남겨져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목격하고 싶은 것은 그런 형태가 아니라는 것, 어디론가는 뻗어나가고 어딘가에서는 다시 얘기되어 계속 움직이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그림의 현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마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동시대 작가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는 것을.
앞으로 전시 관람을 통해 ‘해내야 하는 것’도 있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나의 삶과 예술가의 삶의 접점을 찾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만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원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좋은 예술가는 그리고 내게 필요한 예술가는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온다. 내가 해야 할 건 좀 더 눈과 귀를 여는 것.
마티스, 앞으로도 그는 내 삶에 계속 있겠지. 그것도 영원일 것이다.
**이 리뷰는 문화예술플랫폼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의 문화초대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