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지금 '보이지 않는 내전' 중이다. 총성은 없지만, 대화가 끊긴 식탁과 혐오가 점령한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미 전쟁터와 다름없다. 이 글은 우리를 갈라놓은 네 가지 균열을 살피고, 그 끝에 남은 폐허를 직시하고자 한다.
진영만 있고 대화는 없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정치 이야기는 점점 금기어가 되고 있다. 명절 가족 모임에서는 “그 얘긴 하지 말자”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 직장 회식 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는 분위기를 망치는 위험한 화제로 취급된다. 오랜 친구 사이에서도 어느 언론을 보느냐,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선이 그어진다.
누군가는 말을 삼키고, 누군가는 대화를 피한다. 설명하려 하면 싸움이 되고, 침묵하면 냉소만 남는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되어버렸다.
이 변화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일상에서의 대화 붕괴는 곧 공론장의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설득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저 사람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판단으로 관계를 정리한다.
정치는 더 이상 공공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장이 아니라 정체성을 확인하고 진영을 방어하는 싸움의 공간이 되었다. 정책의 옳고 그름보다 누가 말했는지가 먼저 판단 기준이 된다. 이 순간, 민주주의의 핵심인 토론과 숙의는 기능을 멈춘다.
이런 일상의 단절이 쌓인 결과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2022년 퓨리서치센터가 19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은 정치분열이 가장 극심한 국가 1위로 꼽혔다.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보다, 팔레스타인과의 오랜 분쟁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보다도 높은 수치다. 상대적으로 단일민족 국가이고 역사적·지리적 갈등 요인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분열된 사회가 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응답 비율의 압도적 수치이다. 한국인의 90%가 자국의 정치분열을 심각하다고 인식했다. 그중 49%는 "아주 심각하다"라고 응답했다. 반면 정치분열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1%에 불과했고, 심각하지 않다는 응답도 9%에 그쳤다. 이는 정치적 대립이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사회 전반의 갈등으로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념 갈등은 한국 사회의 오랜 뿌리를 가진 구조적 병폐다. 최근에는 SNS와 유튜브 알고리즘, 선정적인 언론 보도 등으로 인해 그 대립은 훨씬 더 감정적이고 격렬해졌다. 내가 보는 세계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같은 생각만 접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확증편향의 생태계는 건전한 논쟁을 가로막고 진영 논리만 강화시킨다.
2024년 총선과 계엄사태, 2025년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정치권의 언어는 더욱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정당 간 이념 차이는 정책 토론보다 혐오 표현과 상호 비방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아졌다. 선거 토론의 후보자들 역시 상대의 논리를 차분하게 반박하기보다 과거 발언이나 사생활을 끌어내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한쪽이 제대로 된 정책으로 토론을 이끌어가려 해도 상대가 끝내 물고 늘어져 결국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런 모습은 고스란히 유권자들에게 전염되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시도하지 않거나, 시작하더라도 극단적인 언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흔해졌다. 정책이나 사회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은 줄어들고, 내 편과 남의 편을 나누는 편 가르기가 앞섰다.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면서 복잡한 사회 문제는 단순화되고 왜곡된다. 복지 정책 하나에도 '빨갱이'나 '포퓰리즘'이라는 낙인이 따라붙고, 외교 문제도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만 소비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제도적 개선도 충분한 논의를 거치기 어렵고, 공감대 형성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우리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잃었고, 공론장을 통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 자체를 잃어버렸다. 공론장은 조용히 무너졌다. 거대한 충돌 때문이 아니라, 말을 아끼고 피하고 단절하는 일상의 선택들이 쌓이면서.
‘헬조선’과 ‘꼰대’의 서로 다른 진실
청년 세대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취업 문은 좁아졌고 고용은 불안정하다. 청년 체감 실업률은 20%를 넘고,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청년 평균 연봉의 20배를 훌쩍 넘는다. 부모 세대가 30대에 내 집 마련을 했다면, 지금 청년들은 50대가 되어도 전세조차 어렵다.
교육비 부담 역시 커졌다.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은 물가 상승 속도를 앞질렀고, 상속과 증여를 통해 굳어진 자산 격차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끊어 놓았다. 청년들은 노력해도 삶의 위치가 바뀌지 않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래서 ‘공정’이라는 말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구호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 세대의 “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조언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비난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기성세대의 기억은 다르다. 1970~80년대는 절대적 빈곤의 시대였고,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은 혹독했다. 주 6일, 하루 12시간 노동이 일상이었고,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사회를 바꿔냈다는 경험이 있다. 그 시기를 버텨낸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지금 청년들이 겪는 현재의 어려움을 개인의 태도 문제로 해석하기 쉽다. “요즘 애들은 힘든 일을 피한다”,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들의 눈에는 청년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카페에 앉아 불평하는 모습이 나약해 보인다. 자신들은 그런 여유조차 없이 일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양 세대는 모두 고통을 경험했지만,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청년은 기성세대를 ‘꼰대’라 부르고, 기성세대는 청년을 ‘버릇없는 세대’로 규정한다. 문제는 누가 더 힘들었느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경험이 설명되지 않은 채 도덕적 평가로만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서사적 단절은 세대를 공동체가 아니라 대립하는 이해집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연금 개혁, 부동산 정책, 노동시장 개혁 같은 중요한 논의는 ‘청년 대 기성세대’의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된다.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 잃는다는 인식이 굳어질수록, 대화는 사라지고 사회는 분열된다.
이러한 세대 갈등은 정치적으로 활용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대는 누구나 속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며, 이해관계 역시 비교적 단순하게 대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의 몫을 기성세대가 가져갔다”, “미래 세대의 부담을 현재 세대가 떠안고 있다”는 구도는 복잡한 구조 문제를 빠르게 적대적 서사로 바꾼다. 정책 실패나 구조적 불평등의 책임은 흐려지고, 대신 분노는 특정 세대를 향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은 장기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감정적 동원을 택하게 되고,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렇게 세대 갈등은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이용하는 자원이 된다.
계층 고착이 만든 사회적 냉소
세대 갈등의 밑바닥에는, 결국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다’는 계층 이동 불가능성에 대한 공통된 불신이 깔려 있다. “이번 생은 틀렸어, 헬조선에서 흙수저로 산다는 것은”. 한때 우스갯소리처럼 쓰이던 이런 표현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하나의 코드가 되었다. 수저론은 단순한 계층 구분이 아니라 계층 이동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절망의 표현이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출발선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는 구조 속에서 청년들은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을 점점 체화하고 있다.
계층 고착은 단지 경제적 어려움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구조적 병리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공정의 전제가 깨질 때,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를 믿지 않게 된다. 내가 실패한 이유가 내 능력 때문이 아니라 출신 때문이라고 느껴질 때, 타인의 성공은 곧 반칙이나 불공정으로 의심받는다. 이처럼 불신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협력보다는 경쟁, 대화보다는 의심이 우선된다.
청년 세대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간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이든 의미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열정은 빠르게 식고 공동체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낡은 동화처럼 취급된다. 더 이상 계층 상승은 기대되지 않고 그 자리를 조용한 포기가 대신한다. 그 포기는 때로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헬조선’ 같은 단어로, 때로는 극단적인 외면이나 무관심으로 표출된다.
단지 소득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정치적 참여의 불균형, 교육 기회의 격차, 주거 안정성의 위기, 건강권의 붕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특히 주거 문제는 청년들의 삶을 압박하는 대표적 불평등 요소다. 내 집 마련은 이제 희망이 아니라 허황된 꿈으로 여겨지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삶의 반경이 결정되는 현실은 자립 의지를 꺾는다. 그 결과, 부모 찬스는 분노의 상징이 되고 청년들은 노력이라는 말조차 상처를 받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회는 점점 공동체 기능을 상실한다. 타인과 연대보다 내 생존이 우선시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은 여유 있는 자의 사치처럼 인식된다. 모두가 피해자라고 느끼는 사회에서 누구도 가해자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평등 구조를 바꾸는 데 필요한 연대와 협력은 실종되고 대신 각자의 생존 전략만 남는다.
결국 이러한 불신과 냉소는 한국 사회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침묵의 균열로 작동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 신뢰를 갉아먹고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말라가게 한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다.
공정의 얼굴을 한 증오: 젠더
젠더 갈등을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갈등의 중심에 청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20대와 30대는 혐오의 언어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자라고 있다. 청년은 우리 사회의 미래다. 그들이 내면화한 적대감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간 이 사회를 지배할 감정의 지형도가 된다. 더욱이 성별은 정치 성향이나 경제적 처지와 달리 바꿀 수 없는 선천적 조건이다. 이 갈등이 굳어지면 화해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진다.
2024년 조사에서 국민 세 명 중 두 명, 즉 64%가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2025년 조사에서도 57%가 여전히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응답자 다수는 앞으로 이 갈등이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젠더 갈등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이 갈등의 양쪽 모두 자신을 피해자로, 상대를 가해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여전히 유리천장과 경력 단절, 육아와 돌봄의 부담을 호소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불이익은 분명히 존재한다. 통계와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에 청년 남성들은 역차별을 말한다. 병역 의무, 채용 시장에서의 불이익, 여성가족부의 존재 자체를 불공정으로 인식한다. 이들은 "나는 가해자가 아닌데 왜 사과해야 하느냐"라고 반문하며 페미니즘을 적대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양측 모두 자신이 더 피해자라고 느낄 때 공감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공정성에 대한 해석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면서 사회는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 공정은 본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치였지만 이제는 나만 피해 보고 있다는 분노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왜 여자만 혜택을 받느냐"는 남성 청년의 말과 "여전히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는 여성 청년의 말은 서로를 향한 이해가 없다. 공정은 공감 없는 정의가 되었고 그 정의는 혐오로 이어졌다.
젠더 갈등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로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이 갈등은 그대로 반영된다. 여성가족부 폐지 논의, 성인지 예산 삭감 등은 단순한 제도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부재와 감정의 충돌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정치권 역시 이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표심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분열을 더욱 심화시킨다. 한쪽을 대변하는 듯한 언어는 다른 쪽의 반발을 부르고 그 반복 속에서 중재는 실종된다.
젠더 갈등은 청년 세대 전체의 미래에도 영향을 준다. 결혼과 출산, 가족 구성에 대한 가치관은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다. 상대에 대한 신뢰보다 혐오가 앞설 때, 함께 삶을 꾸려간다는 상상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공동체의 기반은 약화되고 사회적 연대는 분열된다.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비교와 계산만이 남는다. 내가 더 억울하고, 내가 더 피해받았고, 내가 더 참고 있다는 논쟁이 벌어진다. 이런 논쟁에는 승자가 없다. 오직 더 큰 상처와 불신만 남는다. 젠더 갈등은 더 이상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국가의 인구 정책과 복지 체계까지 흔드는 구조적 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