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갈등이 남긴 더 깊은 균열들

by 바담풍


사회적 갈등이 남긴 더 깊은 균열


진영은 대화를 포기했고, 세대는 '헬조선'과 '꼰대'로 갈라섰으며, 계층은 냉소 속에 굳어졌다. 젠더는 증오의 언어로 무장했다. 이 네 가지 갈등은 각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 '신뢰의 붕괴'라는 하나의 결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붕괴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실질적인 손실과 파열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가 같은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상대는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타인이 되었고,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하거나 무시해야 할 존재가 되었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공론장은 기능할 수 없다. 토론은 설득을 전제로 하지만, 설득은 상대가 최소한의 선의를 갖고 있다는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과 정체성만 남는다. 시민들은 정책의 내용보다 발화자의 소속을 먼저 확인하고,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를 따진다. 민주주의는 형식만 유지한 채 작동 능력을 잃어간다.


이 붕괴는 개인의 삶으로까지 침투한다. 공동체가 제공하던 안정감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고립된다. 사회적 신뢰가 낮을수록 우울과 불안,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갈등은 정치 뉴스 속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정신 건강과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환경 조건이 된다.


특히 청년 세대는 이 모든 갈등의 교차점에 놓여 있다. 구조적 불평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정치적 양극화가 동시에 작동하는 환경 속에서 청년들은 분노하거나 포기한다. 분노는 타인을 향하고, 포기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어느 쪽도 사회를 유지시키지 못한다.


정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뢰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장기적 정책이 불가능하다. 어떤 제안도 상대 진영의 음모로 의심받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은 뒤집힌다. 교육 개혁, 기후 위기 대응, 사회 안전망 구축처럼 시간이 필요한 과제일수록 정쟁 속에서 소모된다. 사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보다 서로를 공격하는 기술만 축적한다.


이러한 마비 상태는 곧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갈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다. 사회적 신뢰가 낮은 환경에서는 협력이 줄고, 혁신은 지연되며, 장기 투자는 회피된다. 갈등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한다.


결국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는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갈등을 견디고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공동의 미래는 설계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승패의 게임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를 가리는 싸움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분노를 멈추고 대화의 토대를 다시 쌓지 못한다면, 우리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사회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시킨 사회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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