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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Aug 21. 2023

엄마, 좀 일어나 봐요!

엄마가 자꾸 누워 있어요.

이상해요. 엄마가 학교 끝나고 미나 누나랑 나를 데리러 왔을 때는 즐거워 보였는데 집에 오니까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나는 가방에서 도시락 통을 꺼내서 싱크대에 넣고는 손을 깨끗이 씻고 엄마한테 가서 손을 보여 주며 비누로 다 씻었다고 말했어요. 엄마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 이런 걸 스스로 하면 엄마가 좋아해요.


이제 넷플릭스 봐도 되는지 물었더니 엄마가 봐도 된다고 했어요. 나는 미나 누나랑 같이 소파에 앉아 만화 볼 생각에 잔뜩 신이 났지요. 그런데 누나가 먼저 리모컨을 잡더니 자기가 보고 싶은 거를 틀겠대요! 얼른 엄마를 불렀지만 엄마는 우리 방에 들어가서 누웠는지 멀리서 왜에? 하는 소리만 났어요.


"엄마! 누나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요!"


엄마한테 도와 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싸우지 말라고 사이좋게 지내라고만 했어요. 누나는 양보를 안 하는데 말이에요. 하는 수 없이 누나를 꼬집었더니 이번에는 누나가 엄마한테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 엄마! 미준이가 내 팔 꼬집었어! 나 아직 보고 싶은 거 틀지도 않았는데 미준이가 나 꼬집었어!"


엄마가 나와서 혼내면 어쩌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데 다행히 엄마는 나오지 않았어요. 대신 누나가 보고 싶은 거 하나 먼저 보고 그다음에 내가 보고 싶은 거도 하나 보라고 말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약속했다가 누나가 약속을 안 지켰다고 했더니 엄마가 이번에도 그러면 누나한테 직접 얘기하겠대요.


한 번만 더 싸우면 아무도 테레비를 못 보게 할 거라고 화를 내서 누나랑 알겠다고 대답한 후 만화를 봤어요. 누나가 보고 싶은 거를 다 보고 내가 보고 싶은 거를 다 보고, 또 누나가 고른 걸 보고 내가 고른 걸 보고. 넷플릭스를 계속 봤는데 언제 나온 건지 엄마가 갑자기 거실 불을 켜면서 소리를 꽥 질렀어요.


"야, 한 개씩 봤으면 꺼야지, 왜 안 끄고 계속 봐? 빨리 꺼!"


한 개씩만 보라고 말도 안 했으면서 갑자기 화를 내니까 누나랑 나는 많이 억울했어요. 하지만 엄마가 그만 보라고 소리를 질러서 누나랑 그냥 그림이나 그리고 놀았어요.


요즘 엄마는 좀 이상해요. 자꾸 침대에 누워 있고 짜증을 내요. 만화를 많이 봐서 좋긴 하지만요. 그림 그리면서 놀다 보니 배가 고파졌어요. 엄마한테 가서 말했더니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래요. 그래서 아빠방에 가서 배고프다고 했더니 아빠가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 줬어요. 우리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은 정말 최고예요!






첫째가 여섯 살, 둘째가 세 살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정신을 놓고는 밥시간이 되도록 나 몰라라 누워 있었어요. 오랜 학바라지에 비자 연장 신청마저 자꾸 삑사리가 나더니 급기야는 코로나 락다운 때문에 번아웃이 온 줄 알았더랬죠. 돌아보면 길었던 우울의 고름이 터지고 만 기념비스러운 날.


저는 이혼을 쓴 브런치북 두 개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느 정도 마친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놓치고 있었던 아이들의 마음을 제 방식으로 살펴볼까 해요. 겨우 반년쯤 지난 상황에서, 여전히 약을 먹으면서 조금 섣부른가도 싶지만, 그동안 충분히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서요.


아마 썩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겠지요. 이렇게라도 속죄를 하고 싶은 걸까요. 내가 키우기로 한 결정이 과연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네요. 나도 푼돈으로 이 무겁고 버거운 양육의 책임을 갈음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양육권 뺏긴 엄마들이 보면 큰일 날 소리를 해 봅니다.


이미지는 둘 다 Freepik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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