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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Aug 22. 2023

(구)부부싸움이 낯설다

다투는 감정 소모가 무척이나 오랜만

방학 때 굳이 애들 아빠와 하루라도 어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열 살 공주를 위해서였다. 아무데서나 아빠집 얘기를 꺼내는 동생과는 달리 공주는 아직 엄마 아빠가 따로 산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학원 선생님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5년 전에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한 친구에게만 알렸다고 했다.  


어린이날인데 아빠는 어디 가고 엄마랑만 왔냐고 무심하게 물었던 문화센터 선생님께 "아빠는 바빠서요." 했던 공주의 대답에서 나는 아이가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는지 보았고, 아이에게 몹쓸 짐을 지운 듯해 많이 미안하고 슬펐다. 나도 공주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자랑스럽지 않은 정보를 의도적으로 누락하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어른인 나는 잘 안다. 그래서 공주가 방학 끝나고 친구들과 마음 편히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 하나를, 아빠의 부재를 일부러 가리지 않아도 되는 경험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게 애들 아빠와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아이들은 아빠랑 물놀이도 잘 했고 밥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잤다. 독립기념관에 가기 전까진 다 괜찮았다. 날씨가 생각보다 무더웠고, 전시관은 생각보다 주차장에서 멀었고, 전날 종일 물놀이를 한 아이들이 너무 고단했던 게 변수였다. 구경 끝나면 바닥 물 나오는 곳에서 놀자고 아빠가 왕자를 겨우 달래서 20분 정도 관람하고 나왔는데 아뿔싸,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물이 안 나올 건 또 뭐람.


약속을 못 지키게 되자 더운데 고생했다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이고 싶어한 애들 아빠와, 밥 먹고 바로 온데다가 좀 전에 다른 간식도 사 먹었고 차 타면 바로 잠들 테니 얼음물 같은 걸 먹이고 싶어한 나. 피곤해서 넋이 반쯤 탈출한 왕자의 일로 편의점에서 그야말로 사소한 언쟁이 발생했고, 평행선 같은 말이 몇 번 더 오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차마 뭘 고르질 못하던 마트 안에서, 불쾌함 가득한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우리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그만 얘기하자, 조금 참는 중이다, 당신만 참은 거 아니다, 나도 참았다.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멎었고, 아이 둘 태운 차와 어울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찰나였지만 아이들 얼굴에 긴장이 내려앉는 사이, 누군가와 대화하며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아빠랑 즐겁게 잘 노는 걸 보며 고마우면서도 조금 미안했는데 매일 이런 긴장 속에서 살게 하는 게 더 미안한 일이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헤어지길 잘한 걸까.


애들 아빠가 피곤할 텐데 한숨 자라고 말해 줘서 내려오는 눈꺼풀과 씨름 않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물놀이 짐과 캐리어를 함께 옮겨 놓고 그는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한 후 떠났다. 더 기대하는 것도 없고, 더 실망하는 것도 없어 언성을 좀 높여 봤자 그러고 나면 끝인 이것. 다툼 없이 지나간 몇 달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상기해 준 이것은 바로 (구)부부싸움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동이 있고 나면 꼭 생리를 시작한다는 게 학계의 오래된 점심.


(사진 출처는 istock.)





<도비와 함께 노래를>


Chet Baker, Everything Happens to Me.

잘하려고 하다 보면 삑사리도 나고 그러는 거지 뭐. 나만 호르몬의 노비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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