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비 Aug 31. 2023

친구끼리 등산이 뭐 어때서요?

하지만 친구의 소중한 배우자에게 실례하지 않아요

"너는 뭐 가고 싶은 데나 하고 싶은 거 있어?"


오래된 친구 모임의 주동자가 다음 모임 때 하고 싶은 게 있는지를 물어왔다. 나는 육아 빼고는 다 재미있을 때라서 (친구들 얼굴만 봐도 재미가 있다) 뭐든지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다 최초의 취미였지만 못한 지 한참 된 등산이 생각나 제안을 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모처럼 병원에 가 CT 찍고 온 날이라 건강 좀 챙겨 볼까 싶었을 뿐. 그런데 뜻밖의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등산? 야, 등산은 좀 그런 거 같애. 친구들이랑 등산 간다고 말하고 나오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등산이 불륜의 아이콘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다가 무방비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ㅎㅎㅎ아, 등산ㅎㅎㅎ 나는 둘이서 오마카세 먹으러 가자는 말만 안 되는 줄 알았어. 나란히 앉아서 주류도 곁들이니까 유부가 친구랑 오마카세 먹으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었거든."


그러자 오마카세는 그냥 먹으면 되는 거라 괜찮다던 친구가 이내 주류를 곁들이면 무엇이든 다 안 된다고 했다. 등산은 이상하지만 식사는 괜찮다는 말에 전에 있었던 다른 논쟁이 떠올라 친구에게도 물었다.


야, 근데 장어는 괜찮아?

"전에 친구랑 밥 먹으면서 오마카세 얘기하다가 옆집이 장어집이라서 그 얘기가 나왔었어."


아무 잘못이 없는 맛있는 장어 덕분에 또 웃을 일이 생겼다.


문제의 등산은 안 가기로 했고, 군자처럼 훌륭한 아내분을 만나 서로 존중하며 사는 그의 결혼 생활을 축복한 뒤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혼 당일 친구들 만나러 갈 때 블랙박스에다 "아내님,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외치며 차를 얻어 탄 것 만으로 이미 큰 신세를 지지 않았나. 떡볶이를 사 들고 가 아내분과 알콩달콩 나눠 먹는다는 소식을 들으니 울적하던 마음에 흐뭇함이 깃들었다. (이게 이렇게 좋고 부러울 일이다.)


애들이랑 산책 나가서 슈퍼 블루문에게 빌었다. 부디 친구들 모두 백년해로 하게 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구)부부싸움이 낯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