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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ul 19. 2024

이혼 후 시댁 가기

그곳의 다른 이름은 할머니집.

엄마, 오랜만에 할머니한테 인사할래요?

할머니 안 본 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인사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타이밍도 내용도 모두 예상 밖이었던 딸아이의 질문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었다. 좀 오래됐네, 근데 괜찮아, 하고 넘어가려는데 공주 얼굴을 보니 내 대답에 설득력이라고는 없었구나 싶었다. 딴에는 그 대답이 최선이었는데 말이다.


찰나였던 그때 그 당혹감은 예방 주사였을까. 저번 주말에는 점심 준비를 하는데 공주가 들뜬 목소리로 고모네 딸 이름을 부르는가 싶더니 이내 주방으로 달려왔다. 사촌들이 이따 할머니댁에 간다고 같이 놀자고 했단다.


"엄마, 엄마가 언제든지 할머니집에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었잖아! 오늘이에요, 오늘!"


엄마가 같이 살기 싫다고 해서 아빠랑 엄마는 이혼할 거라고 남편이 애들한테 말했던 그날, 달랠 엄두가 안 날 만큼 목놓아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공주의 첫 번째 걱정은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계속 만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응, 데려다줄게. 사촌이는 자고 간대, 어떻게 한대? 물어봐 봐, 짐 챙겨야 할지."


이혼하면서 아이들과 했던 첫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기에 흔쾌히 대답은 했지만 마음은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싶었고, 사촌들이랑 보드게임 할 거면 챙겨 넣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왕자가 말했다.


"엄마, 엄마도 할머니 집에 들어가서 같이 보드게임 하면 좋겠다. 오랜만에 할머니랑 인사도 하고!"


엄마는 괜찮으니 대신 할머니한테 감자랑 양파 잘 먹었습니다 인사 전해 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는 차마 시댁 정문으로 갈 수가 없어 몇십 미터 떨어진 반대편에 차를 세우려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망설이다 마당 앞에 내려 줄까 물었더니 아이들은 그냥 내리겠다면서, 원래는 한 번만 하는 '이따 봐요 뽀뽀'를 둘 다 두 번씩 하고 내렸다. (추가된 1회는 '힘을 내요 뽀뽀' 같았다.)


귀여운 아들딸의 뽀뽀를 두 배로 받았는데 오히려 슬퍼지는 아이러니, 일상의 낮과 밤에서 아빠를 없애놓고 할머니집에는 데려다주는 아이러니. 꼬마들은 몰라도 되는 여러 가지 불편함을 골고루 알려준 사람이 되어 버린 그날, 나는 아이들이 떠난 뒷좌석에 죄책감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몇 시쯤 연락 주겠다던 공주가 통 연락이 없더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배터리가 나가서 사촌의 휴대전화로 연락한다며 데리러 와 달라고 했다. '배터리가 다 됐다고? 그러면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어머님한테 연락을 해야 할까? 옷은 어떻게 하지? 머리는 감고 가야 하나?'


잠시 스트레스를 받으려다 1시간만 지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말자며 그냥 겉옷만 걸치고 나왔다. 그리고 전날 아이들을 내려준 바로 그 장소에서 어머님과 만났다.


오랜만에 보네~ 잘 지냈어?

엄마를 부르며 달려온 아이들을 태우면서 나도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하고 인사했다. 밭에서 따신 채소를 한아름 받아든 나는 애들 아빠 주려다 깜빡했던 오로라 가루와 불꽃놀이 스틱, 모기 패치를 어머님께 드렸다. 나에게는 나와야 했던 시댁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추억만 가득한 할머니댁이기를 바랐다.


아이들은 감자랑 양파 감사하다는 얘기를 잘 전했다는 말을 시작으로 밥 잘 먹은 이야기, 보드게임 한 얘기를 들려주다가 차례차례 기절했다. 나는 생애 첫 도로주행을 나온 때처럼 떨렸던 예전에 비하면 이혼 후의 시댁 방문이 한결 편해져서, 그게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익숙해진 줄 알았던 삶인데, 이혼은 아직도 때때로 낯설고 무겁다. 그래도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랑 좋은 관계를 잘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고, 사촌들과도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시댁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가는 일이 썩 반갑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같은 부탁을 세 번, 네 번, 계속 이어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참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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