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비 Feb 03. 2023

1분에 1만원을 버는 여자

 애 키우는 여자 얘기다.

1분에 1만원을 벌던 여자가 있다. 여자는 손목이 나가도록 필기를 하였고, 주기적으로 침과 수액을 맞으며 학업에 몰두했다. 고생한 만큼 한 나라의 장이었던 정치인 수행을 할 정도가 되었고 매주 외국 출장을 다니기도 했던 여자. 안타깝게도 이 고소득자는 출산 후 아이를 최대한 데리고 키웠던 도비의 전철을 밟기로 했다.  


몹쓸 모성이었다.


남편의 두세 배를 벌던 여자가 진짜 집사람이 된 후 가족의 수입은 반토막보다 더 작아졌다. 여자의 대단히 크지도 않은 아파트는 여자와 아이가 생활하는 공간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는데, 아이를 키우는 일은 힘들고 지친다. 뭔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하염없이 땅 파고 들어가기가 취미이자 특기인 여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수북한 육아가 많이 힘들었는지 도비와 연락할 때마다 어떻게 아이 둘을 혼자 키웠냐는 말을 했다. 도비는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언젠가서부터 도비는 대단하다는 칭찬을 싫어한다.


통통한 볼살이 심장을 정조준하는 조카 구경을 핑계 삼아 영상 통화를 하는 도비에게 여자는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두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맞는 일일까, 여자는 고민했다. 도비는 여자가 일을 다시 시작할 경우의 장점을 줄줄이 나열하며 무조건 나가서 일하라고 여자를 재촉했다. 여자가 막달까지 일하지 않은 걸 두고두고 나무랐던 도비였다.


두 여자의 앓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조카가 눈에 들어왔다. 1분에 1만원을 벌 수 있는 여자의 24시간을 일 년 넘게 오롯이 제 영양주스로 갈아 마신 저 아기의 몸값은 대체 얼마인가, 도비는 생각했다. 1분에 1만원을 벌 줄 모르는 도비네 아들딸도 저 통통이처럼 소중하긴 마찬가지인데, 아쉽게도 재벌집 막내아들딸로 태어나지 못한 도비의 아들딸이 새삼 딱했다. 그 옛날의 도비처럼 아기 똥기저귀 치우고 이유식 하면서 자기 몫의 삶을 소비 중인 여자도 몹시 딱했다. 도비는 귀여운 조카보다 도비의 언니가 더 소중하니까.


"너는 별일 없고?"


화제를 돌리며 여자가 물었다. 요즘 여자와 통화할 때면 늘 등장하는 단골멘트다.


"사는 게 다 별일이지."


도비가 말했다.

 

일은 어떻게 진행 중이냐고 묻는 여자에게 도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태풍의 눈 속에서처럼 시간은 고요히 흘러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양육비를 얼마 받기로 했냐는 말에는 그저 얼마 언더라고만 말했다. 여자가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지을 표정이 딱히 없어 눈만 웃는 그런 미소였다.


여자가 입꼬리로 슬픔을 누르며 짓는 그 미소를 도비도 따라 지었다. 그러다 둘 다 눈물이 나려 한다는 걸 거의 동시에 알아차렸다. 화면 속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위로의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미소 짓다, 입을 삐죽이며 다시 서로를 바라보고 또 미소를 짓다 결국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잠시 후 눈을 떠봐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은 그대로. 거울 보듯 닮은 표정 주고받기를 재차 반복하다 어디 들어갈 데도 없는데 들어가라는 인사를 나눈 후 숙연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눈물을 훔치려고 전화를 끊은 게 어디 도비뿐일까.


비언어적 소통만이 전부였던 몇 초 동안 여자와 도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오고 갔는지.


혼자 힘든 세월 보내는 걸 미처 몰라줘서 미안하다는 여자에게 도비는 입덧할 때 같이 식당에 가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도비가 왕자 태운 유모차를 미는 동안 공주의 손을 잡고 걸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도비가 왕자랑 낮잠 자는 동안 공주를 데리고 카페에 가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설령 여자가 1분에 1만원을 벌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한들 함께해 준 그 모든 시간이 도비는 참 고마웠으니까. 도비의 남편이 집을 떠난 후 공주가 왕자를 하원시킬 뻔했던 그날,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와 준 여자에게 도비는 큰 빚을 졌으니까.  




상환의 기회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여자에게 행사가 들어왔고 마침 도비가 쉬는 날이었다. 도비도 한달음에 달려가 조카를 봐주기로 했다. 동생 집에 사는 어린 공주를 만나러 올 때면 늘 이오 요구르트를 사 오던 여자를 본받아 도비도 조카를 닮은 통통하고 스윗한 샤인머스켓을 가져가 조카를 행복하게 해 줬다. 여자가 먹이지 말라고 했던 흰 빵도 그냥 뜯어 먹였다. 급히 나오느라 아기 신발을 깜빡한 것은 순전히 여자의 잘못이니 조카님 발에 신겨줄 적당한 신발을 사지 못한 도비는 대신 맨발로 코엑스를 누비는 조카의 꽁무니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어울리지 않는 플랫슈즈가 갖고 싶었던 조카님이 엄마가 돌아오기 직전 양말마저 벗어제끼고 하이체어를 탈출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이모의 마음을 알았는지, 함께하는 내내 즐거워만 했던 조카는 별안간 을 쌌고, 행사장 신분증도 못 뺀 채 급히 돌아온 여자는 오자마자 부지런히 똥을 치웠다. (웰컴똥이었다.) 아기가 무엇을 먹고 마셨는지 보고받은 여자는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썩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유모차 밀며 귀염둥이의 사진을 찍다가 도비의 13인치 풀옵션 맥북프로가 떨어져서 귀퉁이가 찌그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여자는 미안해했으니 쌤쌤이다.)


조카님과 보낸 행복했던 하루를 추억하며.


아무리 괜찮으려고 해도 괜찮을 수 없는 시간을 지난 중이지만, 가족이 없었다면 도비는 과연 이혼할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 기댈 친정식구가 없었다면 아마도 몇 년을 더 참고 지냈을 테니.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없는 이들을 생각하며 다시 먹먹해졌다. 다음에 여자와 통화할 때는 도비가 이혼녀가 된 건 다 니가 다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봐야겠다. 호다닥.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 가장 쉽고 슬픈 뱅쇼 레시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