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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an 12. 2023

세상 가장 쉽고 슬픈 뱅쇼 레시피

엄마의 뱅쇼 냄비는 어쩌다 짬통이 되었을까

준비물


- 저렴이 와인 두 병과 와인 따개,

- 로켓배송으로 받은 시나몬스틱, 정향, 팔각, (집에 있다면 생강이나 생강청도)

- 사과, 그리고 귤이나 레몬, 오렌지 등 비타민C가 많이 들어간 씨트러스계 과일, (혹은 과일즙)

- 설탕이나 꿀 같은 단 거.

(여기에다 과일을 남기는 어린이 두 명까지 있으면 뱅쇼 제조는 한결 쉬워진다.)



임신했을 때 남의 집에 갔다가 감기 기운이 갑자기 심해졌는데 집주인에게서 잘 끓인 뱅쇼 한 잔 얻어먹고 감기가 씻은 듯이 나음을 입었던 2013년 겨울을 시작으로 해마다 겨울이면 뱅쇼를 만들어 먹었으니 나의 뱅쇼 구력은 올해로 10년째다.


어머님과 사건이 있었던 작년 겨울은 제외한다. 뱅쇼를 만들어 먹을 정신이 없었다.


도비는 술고래는 아니지만 뱅쇼는 제법 많이 만들어 보았으니 이제 본격 '발로도 할 수 있는 뱅쇼 만들기'를 시작한다.






뱅쇼 만들기, 1단계


"엄마, 어디 가?"

숙제시켜놓고 나가다가 딸아이가 물으면 약 사러 간다고 말하고서 얼른 편의점에 가 와인 두 병을 사 온다.

(딸이 없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사 두면 된다.)



뱅쇼 만들기, 2단계


아이들이 숙제 끝낸 걸 확인하고 양치와 잠옷 환복까지 시킨 뒤 약속한 테레비를 틀어준다.

(주말 대낮에 느긋하게 작업을 시작해도 상관없다.)



뱅쇼 만들기, 3단계 


와인 두 병을 깨끗한 냄비에 콸콸 들이부은 다음, 꼬마들이 남겨서 색이 변한 사과를 비롯한 귤과 배, 그리고 꼭지가 슬슬 갈색이 되도록 식탁에 오래 머문 샤인머스캣 등 썩지만 않았으면 집에 있는 과일은 대충 겉을 정리해서 숭덩숭덩 썰어 넣는다. (도비는 사과와 귤은 크리스마스 때 어머님한테서 받아온 걸로 넣었다.) 레몬은 마침 집에 없고, 있어도 지금 내 상황에선 씻기 귀찮은 과일이니 그냥 집에 있는 레몬즙을 쭉쭉 두세 번 정도 짜 넣는다.

묵은 과일 짬통이 되어버린 내 뱅쇼 냄비.


그래도 씨트러스 느낌이 부족한 듯하면 이혼하는 딸에게 아빠가 직접 만들어 선물한 자두청도 두어 스푼 잘 넣어준다. (불현듯 처량해지는 것을 꾹 참고 '고마워요 아빠, 잘 먹고 잘 살게요,' 라며 속으로 읊조리는 것이 포인트!)



뱅쇼 만들기, 4단계


시나몬 스틱은 크기 따라 너덧 개를 넣는다. 팔각과 정향도 손에 잡히는 대로 적당히 넣되, 각각 냄새를 맡아본 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미심쩍은 재료가 있다면 그걸 조금 적게 넣으면 된다.

이번에 도비는 팔각은 예닐곱 개쯤 넣었고 정향은 아마 열다섯 개는 넣지 않았나 싶다. 집에 생강이 없으면 안 넣어도 되지만, 있어도 손질하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 ‘순도 85%에 달하는 생강진액과 꿀이 든 생강차 분말’을 얼른 한 숟갈 떠 넣어도 아무 문제 없다.



뱅쇼 만들기, 5단계


적당히 뭉근히 끓여 준다. 알코올 맛이 많이 나는 게 좋으면 중약불로 10분 정도만 끓이고, 알코올을 많이 날리고 싶으면 조금 더 센 불에서 조금 더 오래 끓이면 된다. 단맛은 이때 살살 취향껏 조절하시라. (도비는 자두청과 생강차 분말을 넣어서 따로 단 걸 더 넣지 않았다.) 뱅쇼가 끓는 동안 뜨거운 물로 잘 쓰는 공병을 대충 씻어 놓자.



불을 끄고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뱅쇼 만들기도 완성이다. 이제 체에 거른 뱅쇼를 병에 넣은 뒤 몸이나 마음이 으슬으슬할 때마다 컵에다 한 잔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기만 하면 된다. 출근할 때 데워서 텀블러에 넣어가면 직장에서도 내 컨디션을 살뜰하게 챙길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아직 실천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원래부터 주먹구구식으로 뱅쇼를 만들어 먹지는 않았다. 한때는 '뱅쇼 장인이 되어 볼까'라는 포부가 있어 독일어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글뤼바인 영상을 찾아도 보고, 영어로도 조회수 높은 영상을 열 개 가까이 찾아보며 레시피를 정직하게 따라 만들기도 했다. 오직 단 한 병의 뱅쇼를 생산하기 위해 일부러 마트에 가서 작고 소중한 과일을 고루 구매하여 한 알, 한 알, 베이킹소다로 정성껏 문질러 씻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부 8단 짬도 제법 되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뱅쇼용 과일을 따로 사서 재료를 계량하고 어쩌고 할 여력이 없다.

게다가 아이들이 애매하게 남긴 과일을 내가 일일이 먹기도 마땅찮고, 집에 꼬마 둘과 입 짧은 어른 한 명 뿐이다 보니 얻어온 과일은 시들어가는데 과일과 농부에게 미안하여 버릴 수도 없고, 해서 결국은 짬통처럼 재료를 냄비에 모아 뱅쇼를 만들게 되었다. (과일이 집에 넘쳐나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이상하게도 과일을 잘 안 먹게 된다.)


떨어져라 감기 감기!


눈물 나는 일이 잦아져서 그런지, 딱히 대단한 걸 하지 않고 사는데도 자꾸 지친다. 현대인의 만성피로랑은 조금 다른 고단함이다. 아이들이 있어서 힘든가 싶었는데—분명 그런 면도 있지만—아이들이 아빠를 만나러 가고 없는 주말에 어쩐지 더 지쳤던 걸 보면 꼭 아이들 때문만도 아니다.

그러니 감기 기운이 통 떨어지지 않는 요즘 도비는 와인 따개로 코르크를 뽑는 힘, 딱 그 정도의 힘만 들이고서 나만을 위한 유럽의 쌍화차를 심플하게 만들어 먹는 이벤트가 필요했다.


구정이 되어 식구들이 모이면 분명 남는 과일이 생길 테니까 이번 설에는 친정에 갈 때 뱅쇼 만들 향신료를 좀 챙겨서 가야겠다. 어쩌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쉽고 간단한 뱅쇼 만들기에 한 번 도전해 보시면 좋겠다. 여느 다른 맛있는 음식들처럼 뱅쇼도 나눠 먹을 때 더 맛있기 때문이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쉽고 슬픈 뱅쇼 만들기의 마지막 단계를 깜빡할 뻔했구나.



뱅쇼 만들기, 그 마지막 단계


따뜻하게 끓여서 남편과 함께 먹으면 어쩐지 더 맛있었던 그 시절의 뱅쇼는 기억 속에 고이 접어둔다.







코너 속의 코너, <도비와 함께 노래를>


내 멋대로 레시피로 뱅쇼를 만들면서 이 노래를 중얼거렸다. "비교하지 마, 상관하지 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걸. 내가 택한 이곳이 나의 길."


도비의 레시피는 정답이 아니다. 입맛에 맞게 만들어서 맛있게 드시면 된다.  

가능하다면 아침에는 듣지 않으시길.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가 다 지나간 듯 기운이 빠져버릴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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