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겨울 보스턴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얽힌 여러가지 괴담들을 뒤로하고 21세기 첫 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단지 연도의 숫자가 바뀌는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세기가 변한다는 것에, 특히 새로운 천년이 시작한다는 것에 주목하여 자신이 무언가 큰 전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꼈던 것같다. 유독 '새로운 시대'라는 말이 빈번했던 그 해, 나는 대학 마지막 한 학기를 남기고 미국에서 반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해 보스턴의 겨울은 추웠다. 나는 하버드 마크가 세겨진 커다란 반지를 낀 중국인 아줌마에게 싸게 빌린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바로 서면 허리가 다 펴지기도 전에 머리가 닿을 만큼 천장이 낮았고 난방이 되지 않아 침낭과 작은 온풍기를 끼고 잠을 잤지만 아침에는 어김없이 추위에 잠이 깻다. 방 안에 화장실이 달려있지 않은 탓에 아침 저녁으로 아랫집에 화장실을 빌리러 내려 가야 했고 샤워는 학교의 샤워의을 빌렸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폭삭'이라 할 정도로 기울은 집안 사정에 떠나온 터인지라 한 달에 몇 백불씩 받아 쓰는 돈이 귀하고 귀했다.
아침이면 납작한 옥수수빵(또띠야)에 칠면조햄과 셀러드, 간혹 치즈를 넣고 토마토 소스를 발라 둘둘 말은 랩(wrap) 센드위치를 만들어 학교에 갔는 데, 이를 반으로 나누어 점심, 저녁 두 끼를 해결하거나 점심을 안먹은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름 맛이 있었는 지 아니면 다들 나처럼 가난하였는 지 나의 센드위치는 꽤나 인기가 있어서 이 샌드위치를 기다리는 친구도 몇몇 생겨났다.
친구에게 소개 받은 보스턴 벙커힐 커뮤너티 스쿨은 누구나 등록만으로 개설 과목을 수강할 수 있었다. <하버드의 공부 벌레들>이란 미국 드라마를 보며 어린 시절 미국 유학의 꿈을 가졌던 나는 그 꿈을 아주 잠시나마 이룰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두 과목을 수강하고 한 과목을 학과장(dean)의 허락을 받고 청강하였는 데 수업이 없는 날에도 학교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오전의 대부분의 일정은 학교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영어 과외를 받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오후가 되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다시 자리를 옮겨 하버드대학교의 조합서점(co-op)이나 카페가 딸린 서점(Barns and Noble)에서 책을 읽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베이글 센드위치 가게 우봉팽(Au Bon Pain)에서 센드위치를 먹었는 데 지금도 타이거 오코시(Tiger Okoshi)가 연주한 루이암스트롱의 곡을 들으면 이 음악을 들으며 아껴 먹던 센드위치의 허니 머스타드 맛이 혀끝에 스친다. 몇 해전 보스턴에 들렀을 때 먹은 치킨 센드위치는 이제는 다시 그 맛이 나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라는 말은 미각에도 해당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