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자리 잡은 나무와 함께 사는 법
#1
나카가와(那珂川)는 후쿠오카시를 횡단하는 강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강이라고 하면 한강 정도를 떠올리는 데 한강은 이름 그대로 큰 강이다. 한강에 비하면 나카가와의 너비는 개천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서 뻗어나온 가느다란 지류가 나무의 잔뿌리처럼 후쿠오카 전체에 넓게 가지를 뻣고 있어 걷다 보면 중간 중간에 서너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들을 수 없이 만날 수 있다.
후쿠오카 도심에서 벗어나 무척이나 한적한 동네인 오하시(大橋)에는 아침이면 동네 사람들이 나와 이 나카가와 강가를 따라 양 옆으로 뻣은 산책로를 띄엄 띄엄 걷는다. 강을 따라 난 갓길이니 큰 굴곡 없이 일직선으로 뻣어 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다 보면 강의 흐름과 상관 없이 중간 중간 급하게 휘어진 길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길을 날카로운 각도로 꺽어 놓은 장애물은 한 아름이 됨직한 커다란 나무들이다.
긴 시간 동안 전쟁의 화마를 피하여 살아 남은 이 도시에는 어른 둘이 마주 안을 만큼 굵은 둥치의 고목들을 쉬이 눈에 띄고 조금만 교외로 나가도 나무 줄기에 푸른 이끼가 가득 서린 숲이 나타난다. 수십년 수백년된 나무가 흔한 이 동네에서 한 아름 정도 되는 나무를 지키려고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의 진로를 예각으로 꺽어 놓았을까. 연유야 어찌되었던 나는 이 동네를 걸으며 곳곳에서 이처럼 운좋은 나무들을 많이 만났다.
#2
후쿠오카의 명소 다자이후 천만궁은 1400여년 전 지어졌다. 경내 곳곳에는 보기 드문 거목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특히 천만궁의 본당 뒷 뜰에는 '부부나무'로 불리는 한 쌍의 녹나무가 서 있다. 두 그루 모두 두꺼운 밑둥으로부터 높게 솟아 하늘을 향해 넓게 가지를 뻣고 있는 데, 여전히 울창한 잎들로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이 부부의 수령이 천 오백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장소가 장소이다보니 경내의 거목들은 대부분 몇 백년이 훌쩍 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 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사원 지붕의 한 가운데를 뚫고 나와 넓게 가지를 드리워 있다. 이 나무의 밑둥은 사원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을 터였다.
#3
차를 몰고 40분 정도 교외로 나오면 미츠가란 지역에 처가의 조부모님의 영정을 모신 절이 있다. 화장이 보편적인 일본에는 골분을 가족묘에 차곡 차곡 안장하는 데 처가는 불교를 믿는 터라 조부모의 영정을 절에 따로 모시었다. 일본에서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한국처럼 21제, 49제를 지내는 데 이후에 3년(만2년), 7년, 13년, 17년, 23년, 27년, 33년 째 해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라고 하여 우리처럼 여러 음식을 올려 놓고 젯상을 차리지는 않고 불상 앞에 영정을 모시고 간단한 과자 등을 올리는 것이 제사상의 음식이 전부이다. 제사가 시작되면 향을 피우고 우리가 하듯이 가족들이 돌아가며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불교식 행사인 만큼 불경을 읽는 것은 빠지지 않는다. 금년 봄 와이프의 친가쪽 할머니의 7주년 기일 행사에 참가하였다. 매년 큰 상 가득 음식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내는 한국에 비하여 33년 째까지 간헐적으로 기일을 챙기는 일본의 추모 방식이 훨씬 더 간소화된 듯이 보이지만, 집에 영정사진 모셔 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밥과 차를 올리는 것을 보면 일본 사람들은 고인이 살아있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오전 중에 제사가 끝나고 시골의 포장 도로를 따라 좀 전 스님이 알려준 식당을 향했다. 시골 사람들의 거리감은 도시 사람들과 다르다. 시골에서 길을 물었다가 '차타고 금방'이란 말만 믿고 나섰다가는 반나절을 내내 달려 도착하기도 한다. 역시 한참을 달려 식당에 도착했다. "미도리(녹색)" 이란 이름은 산 속에 있는 식당에게는 너무나 뻔한 이름이지만 사방으로 뚫린 창은 사방의 산들이 가득 차 온통 "미도리(녹색)"이다. 계곡을 끼고 통나무로 지은 이 식당은 꽤나 넓은 홀에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테라스까지 딸려 있다. 메뉴는 지역의 농산물로 만든 건강식 요리 부페. 인가가 보이지 않는 지방 도로를 한참이나 따라 도착하였는 데 빈자리가 드물 정도로 손님들이 많다. 일본에 온 후에 자주 먹는 음식이 "다마고 가케 고항"이다. 이른바 계란밥인데 흰 쌀밥에 날 계란을 넣고 간장을 조금 뿌려 섞어 먹는다. 밥, 계란, 간장. 지극히 간단한 구성에 된장국(미소시루)를 곁들인 전문점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재료가 간단하 만큼 각 재료에 대한 소위 '코다와리(품질에 대한 집착이나 고집)'이 존재하는 데 어느 지방의 쌀로 지은 밥, 직접 집에서 방목한 계란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이 음식점이 있는 지방은 닭고기와 계란이 유명한 지방인만큼 여러 가지 음식들 중에도'카라아케'(닭고기 튀김)과 '다마고 가케 고항'(계란밥)이 유독 인기가 있었다. 쌀이나 계란이나 어떤 기준으로 상품을 나누는 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혹은 맛있다는 어떤 쌀로 밥을 짓고 유명하다는 지방에서 계란을 먹어 보면 분석도 관찰도 필요없이 그저 더 맛있다. 입은 이기적이다. 좋은 음식이란 먹어보면 안다.
포만감을 식히려 테라스에 나서니 계곡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이 나무로 지은 건물은 게곡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지어졌는 데 테라스와 홀의 일부는 계곡 쪽으로 튀어 나와있어 일부가 떠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떠 있는 바닥의 아래를 보니 건물 밑으로 부터 길게 뻣은 나무가 건물을 떠 받들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그 나무가 원래 있던 자리를 피해 건물을 지은 것이다. 건물의 모양이 정사각형을 이루지 못한 것도 이 나무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내세울 일도 없이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듯 건물이 나무를 빗겨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