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스님의 강연을 듣다가 '이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밥'이 무엇인가 검색을 하여보니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경상도 사투리라 하고, 어떤 이는 북한에서 쌀밥을 이밥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은 먹지 못하고 왕족인 이 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먹는 밥이란 의미로 이밥이라 하였다는 이도 있다. 결국 이밥은 쌀밥이란 뜻이다.
아침마다 북악산 중턱 말바위까지 올라 북촌 한옥 마을을 지나 내려온다. 산 위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산이 가까운 동네에 사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큰 호사이다. 이른 아침 한옥 마을을 지나면 찌개가 보글보글 끊어 오르는 예전 다시다 광고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버님 댁에 보일러 하나 넣어드려야겠어요'라는 광고 속 멘트가 들릴 것만 같다.
어머니 진지 드세요. 시어머니의 아침잠을 깨우는 며느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는 아기를 깨우듯 부드럽고 기도를 올리듯 공손하다. 집집마다 아침 상을 차리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음식 냄새가 흘러나온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요리를 하여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은 이제 이 동네가 아니면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 되었다.
집집마다 풍기는 냄새가 어떤 음식일까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킁킁. 금세 30첩 한정식이 차려질 판이다. 생선 굽는 냄새, 청국장 냄새, 불고기 냄새... 아침부터 무얼 그리들 차려 드시는지. 그 다양한 냄새와 떠오르는 음식들 속에 모든 집에서 빠지지 않는 냄새가 있다. 30첩 반상에 떡 하니 앞자리를 차지한 푸짐한 쌀밥. 밥 짓는 냄새이다.
이것도 나이 탓일지 요즘 흰쌀밥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다. 다이어트다 당조절이다 하며 건강을 위해서는 되도록 밥을 적게 먹으라고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밥 없이 먹으면 딱히 만족스럽게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한다. 요리와 반찬이 메인이고 밥이 그들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베이스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나이가 들 수록 흰 쌀 밥이 주인공이고 다른 반찬들은 그저 밥맛을 거들뿐이란 생각이 든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 밥 자체가 맛있는 가게들이 많이 생겨났다. 좋은 쌀을 쓰고 정성스럽게 밥을 짓는, 본질에 충실한 가게들이다.
창덕궁 옆길을 따라 원서동을 향해 걷다 보면 왼쪽에 재동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보인다. 이 언덕길 중턱 즈음에 '이로울 이'자를 한자로 쓰고 밥을 한글로 적은 바닥 간판이 보인다. 이로운 밥, 이밥. 이밥은 아주 작은 가게이다. 테이블이 단 두 개, 그나마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밥을 먹어야 하는 좁은 탁자이다. 메뉴는 주먹밥. 1인분에 만원 초반대의 식대이니 아무리 회전율이 좋다 하여도 두 테이블의 하루 매상이 대강 떠오른다. 돈을 벌려고 식당을 한다면 그다지 좋은 구상이 아니다. 나는 산책 길에 이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두 가지가 궁금했다. 이 가게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가게의 사장은 어떤 사람일까.
아침에 잘 지은 이밥을 떠 올려 서였는지 오랫동안 벼르던 이 식당에 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방금 전화를 하니 작은 가게의 여주인이 전화를 받는다. 단체 주문을 받듯 친절하다. 가게가 너무 작아 예약은 받지 않는다고, 내일 점심에 오기 전에 전화를 주면 빈자리가 있는지 알려 주겠다고.
내일 점심은 이밥에서 이밥을 먹어야지. 잘 지은 밥으로 지은 주먹밥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