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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20240911 잠실 교보

by 박종호

오늘은 입이 호강하는 날이다. 점심에는 동네의 작은 식당에서 잘 지은 밥으로 만든 연꽃밥과 취나물 주먹밥을 먹었고 저녁에는 남대문식 고등어조림과 제주식 갈치조림을 앞에 놓고 좋은 쌀로 지은 솥밥을 먹었다. 잘 지은 이밥(쌀밥) 두 끼를 연달아 먹으니 밥에 대한 나의 예찬이 틀리지 않았다고 뿌듯해하며 지하 서점의 서가를 걸었다.


책이 가득 쌓인 매대 위에는 12주 연속 베스트셀러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김훈 작가의 수필집 <허송세월>이 막 출간되었을 무렵 나는 이 서점에서 이 책의 서문을 읽었다. 주변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여러 이야기들을 술술 끄집어내는 작가의 글을 보고 있으면, 터번을 쓴 마술사가 피리를 불고 그 피리소리를 따라 항아리 밖으로 솓아 오르는 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디 오늘은 이 책이 나와 합이 맞는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점괘를 뽑듯 획하고 책장을 펼쳤다.


(비빔밥을) 비빌 때, 어머니는 숟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을 써서 가볍게 비볐다.(중략) 어머니는 "살살 비벼라.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중략)
비빔밥에는 희 밥알의 존재가 한 개씩 살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물들의 개별성이 뒤범벅이 되면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
(<허송세월>, 김훈, p199)


오늘 내가 먹은 맛난 밥들에 딱 맞는 내용이다. 오늘은 이 책을 사야 하나 보다. 잘 지은 밥이란 한 알 한 알 쌀의 입자가 형태를 갖추어야 하고, 주먹밥으로 비빔밥으로 나물과 섞여 있어도 그 본래의 맛과 형태를 잃지 않는, 자신의 개성을 지키며 타자와 어울리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말씀. 화이부동은 군자만의 덕이 아닌 것이다


책을 들고 전철에 올랐다. 이어폰에서는 쳇베이커의 <마이 퍼니 밸런타인>이 흐른다. 벗이 좋아하는 노래다. 무릎 위에 놓인 책의 뒷면에 작가의 손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 보면 헛되어 보이는 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가만히 여러 번 다시 읽어 본다. 평생 글쟁이로 살아온 작가가 '손가락이 빠지게'가 아니고 '혀가 빠지게' 일했다는 표현에 짧은 웃음이 나왔다. 그다음 구절은 참으로 현란하나 역시 공감이 간다. '허송'이란 목적이 없는 상태이라면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지워진 허송의 순간, 후회도 기대도 사라진 현재에 몰입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허송세월로 바쁘다는 작가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지금까지 자신을 현재에의 몰입에서 가로막던 이런 저련 잡념에서 벗어나, 남은 시간을 온전히 현재를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닐는지.


맛있는 밥으로 배를 채우고 좋은 책을 만나 마음이 든든한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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