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FT 감별법
세상은 T와 F의 차이에 관한 논쟁으로 시끄럽다. 어느 날 엄마가 너무 슬퍼서 빵을 사 왔다. 당신은 엄마에게 무슨 말을 건넬 것인가? T의 전형적인 대답은 슬픈데 왜 빵을 사 왔어? 혹은 무슨 빵을 사 왔을까이다. 반면에 F는 엄마에게 무슨 슬픈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T인 친구가 자기 같은 T들은 정말 공감하는 내용이라며 동영상 짤을 하나 보내주었다.
F가 눈을 뜨니 의자에 몸이 묶여 있고 T들은 그를 둘러싸고 있다. T들은 F에게 묻는다. 만약 어느 날 여자친구가 바퀴벌레로 변했다면 어떻게 하겠어? F는 T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기 위해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묻는다. 얼마나 사귀었는 데요? T는 대답한다. 3년 반, 그중에 동거 2년. 동거를 2년 하였으면 거의 부부에 가까운 사이인데 아무리 바퀴벌레로 변했어도 데리고 살아야지요. F는 떠오르는 데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이 말이 T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말을 바꾼다. 아니요 죽여야지요 밟아서! 하지만 애초에 F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T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틀렸어, 사람이 어떻게 바퀴벌레로 변하나? 그리고는 F에게 에프킬러(F-killer)를 뿌린다. 차별받는 T들이 F에게 받은 설움을 복수한다는 내용의 SNL 콩트의 내용이다.
나의 여자친구가, 3년 반을 사귀고 그중에 2년을 동거한 여자친구가 바퀴벌레로 변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F인 덕에 그럴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전혀 없다는 부정을 하기 전에 정말 그러면 어쩔까를 한번 생각해 본다.
우선 내 앞의 바퀴벌레가 정말 나의 여자친구라면, 나는 내가 현재 그녀를, 바퀴벌레로 변하기 직전까지의 나의 감정을 돌아볼 것이다. 만약 정말 사랑하는 여자 친구이라면 나는 그녀를 조심스레 손에 올리어 촘촘한 그물망으로 싸인 안전한 우리 안에 넣을 것이다. 그녀가 고양이나 새에게 장난감이나 먹이로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그녀의 안전을 확보하고, 그녀를 인간적 존엄이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리라.. 사람이 먹는 음식을, 특히 그녀가 곤충으로 바뀌기 전 좋아했던 음식을 잘게 썰어 그녀의 작은 입이 씹어 먹기 편하도록 그녀의 우리 안에 넣어주리라, 그리고 그녀의 배설물을, 나는 바퀴벌레의 배설물을 본 적은 없지만 매일 깨끗하게 청소하여 주겠다.
시간이 한참이 흐르고도 그녀가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슬픔을 접고 그녀를 현재의 그녀로 받아들이리라. 힘든 일이지만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새 여자친구가 집에 오면 나는 그녀에게 그녀, 아니 이제 여성성을 찾을 수 없는 그를 그녀에게 소개하리라. 지금은 좀 모습이 그렇지만, 나의 오랜 친구야, 믿을 수는 없겠지만 원래는 사람이었고 한 때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런데 그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길 것이다. 신중하여야 한다. 바퀴벌레가 되었지만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만 이렇게 변해버렸어. 그래도 나는 이 친구의 영원한 동반자야. 암, 그렇지, 이 친구의 마지막까지 내가 지켜주려고 해. 이 정도면 새로운 관계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고 이전의 여자친구에게도 분명 큰 실례는 아닌 것이다.
시간이 또 한참 지나면 나는 가끔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리라. 하지만 그녀의 생일날만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달력에 표시를 하자. 이 또한 금세 그녀의 생일이 언제였는지 잊힐 테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음식을 해주는 것은 오래전 일이고 아마도 팻샾에서 안전한 곤충용 사료를 사서 넣어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쁜 날에는 며칠씩 먹을 것을 넣어주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화들짝 놀라 우리 안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움직임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한편으로는 이 지루한 사육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여자친구와 살게 되면 나는 더욱 그를 불편해하리라. 처음에는 그가 사는 우리를 여자 친구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놓아두겠지만 여자친구는 이 또한 못마땅해하겠지. 바퀴벌레를 좋아하는 여자란 드물다. 어느 날 나는 아주 큰 결심을 할 것이다. 나는 바퀴벌레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 물을 것이다. 자기, 아직도 나를 사랑해? 발성 기관이 없는 그녀는 긴 더듬이를 휘휘 저을 테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아니 무슨 말을 하였든 중요하지 않다 나의 결심은 확고하다. 나는 그녀가 사는 우리의 촘촘한 그물을 벗기고 우리를 문을 활짝 열 것이다. 미안해, 내가 자기를 너무 오래 잡아 놓았어. 다 내 욕심이야. 자, 이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가.
우리의 문을 활짝 열고 한참이 지나도 그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다른 바퀴벌레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한 마리 곤충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의 문을 열어둔 채 무관심한 척 다른 곳으로 가서 딴 청을 하지만 사실 곁눈으로 계속 우리 안을 보고 있다. 그녀, 아니 그가 나와 자기 발로 나와 어디론가 가 주기를, 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떠나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곤충으로서는 이제 활발하게 움직이는 나이가 아닌가 보다. 혹시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못 보았나? 아니다. 바퀴벌레의 몸속에 사는 그녀는 여전히 인간적인 감정과 사고를 하고 있고 이제 그처럼 그녀도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이 우리가 자신의 생명의 담보인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바퀴벌레로 바뀌었을 때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사람이 바퀴벌레가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의 눈앞에서 일어났고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납작한 바퀴벌레로 변했다. 내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고 그녀의 존재가 귀찮아지기 시작한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이다. 좀 못생겼어도 강아지나 고양이, 심지어 비둘기나 금붕어로만 바뀌었어도 이토록 빠르게 감정이 사그라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퀴벌레라니. 보기만 하여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소르라치게 놀라 저 멀리 도망가 버리는 바퀴벌레라니.
한동안은 남아 있는 사랑의 힘으로, 그다음은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책임감으로, 몇 개월 후에는 그저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녀를 돌보았다. 어쩌면 나는 훨씬 더 일찍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더 시간 이 귀엽지 않은 벌레와 함께 살아온 이유는, 말도 안 되는 일이 한번 더 일어나 바퀴벌레가 다시 그녀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느 날 다시 사람이 된다면?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도 그 시간은 여전히 오지 않았고 나는 이제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었다. 바퀴벌레의 수명이 길어야 2년이라는 데 그 2년을 모두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우리 안에서 죽는다면 이전에 사람이었던 바퀴벌레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문 밖으로 기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바퀴벌레가 든 우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제일 가까운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올랐다. 숨이 차오르고 손안에 든 우리는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한 시간 넘게 산 길을 걸어 다시 길이 없는 숲 속으로 잠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그 시간 산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큰 소나무 뒤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아까처럼 우리의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런다면 금세 새들이 들어와 그녀를 삼켜버릴 테니까. 나는 우리 안을 한번 쳐다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온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오르느 동안 너무나 힘 들었는 데, 마치 멧돼지에게 쫒기 듯 단박에 뛰어서 산을 내려왔다. 나는 산을 다 내려와서도 한참을 달렸다.
자유인가, 후련함인가, 슬픔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눈물이 났다. 웃음도 났다.
그렇다. T의 말처럼 애초에 사람이 바퀴벌레로 변하는 일 따위는 일어날 수 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다.
갑자기 T가 부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