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서재를 터는 도둑들
꼼짝 마!
그의 얼굴에 손전등 불빛이 비추었다. 그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복면이 아니면 흔하디 흔한 마스크라도 할 것을. 상대방에게 얼굴이 빤히 보일 것을 생각하니 후회스럽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 다 글러버렸다.
손에 든 보따리 내려놔!
그는 머리 위로 올린 손에 든 보따리를 내려놓으려 무릎을 굽혔다. 손을 내리지 않고 보따리를 내려놓으려니 아까 보다 더 엉거주춤한 모양새이다. 그는 보따리를 내려주고 싶지 않다.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고 있는 이가 무섭지만 막 자기 것이 되려 했던 보따리 안의 물건을 그냥 돌려놓기는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냥 냅다 달릴까?
그의 머릿속에 잠시 자기가 들어온 퇴로가 떠올랐다. 헛된 바람이다. 이미 잡힌 몸이다. 어디로 달려도 밤새 달려도 그는 다시 잡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꾹 감았다. 눈부심이 사라졌다. 그는 두 팔을 든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직 그의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 있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미련을 버리니 미간의 주름도 펴졌다.
그래 항복이다. 항복!
깨끗이 항복을 선언하고 온전히 포기하니 마음이 더욱 차분해졌다.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는 데 마음의 평화라니? 하하. 짧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모든 것이 결정 나 버렸다는 안도의 웃음인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져서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허리를 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똑바로 서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쭉 펼치고 있으니 마치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잠시 후 그는 툭 하고 두 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주머니 안에서 찰랑하고 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눈을 뜨고 주머니를 열어 앞으로 내보였다. 주머니 안에는 새끼손톱만 한 작은 구슬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손전등이 주머니 안을 비추자 구슬들은 불빛들을 사방으로 반사시켰다. 마치 주머니 안에서 밝은 빛이 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
손전등의 주인은 대충 구슬을 살피더니 곧 그의 손에서 확! 하고 주머니를 낚아채었다. 그 순간 그는 사라졌던 미련이 다시 살아났는 손에 든 주머니를 꽉 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황종료. 남아 있던 긴장마저 풀리며 휴-하고 긴 한숨이 나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손전등의 주인공은 아무 말도 없이, 흔한 인사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한 손에 주머리를 흔들거리며 그가 걸어 들어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꼿꼿이 서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그의 손에 들린 주머니의 형태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는 손전등을 끄고 어둠 속에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그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눈앞에는 빛 한 점 없이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는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잠시 동안 자기 손에 들렸던 주머니를 떠올렸다. 주머니 안에는 수많은 구슬들. 그는 잠시동안 자기 손에 들렸던 주머니의 무게를 다시 한번 더 떠올려 보았다. 자신도 알지 못할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의 시간 구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항상 차고 넘칠 것만 같던 시간 주머니가 비어져 가자 남은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다. 또 누구에게나 빠르게 사라진다. 시간을 부여잡고, 되돌리고 싶었던 그는 급기아 신의 방에 몰래 들어가 금고 안의 시간을 훔쳐 나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달 빛 한 점 없어 칠흑 같은 밤, 그는 신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신의 금고에는 열쇠가 없다. 금고 안에는 인간들이 잃어버린 시간 구슬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인간들이 부주의하여 잃어버리고, 실수로 떨어뜨리고,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이렇고 저렇게, 알게 모르게 허송하여 버린 시간들이다. 그는 가지고 간 흰 자루를 활짝 열어 그 안으로 구슬들을 쓸어 담았다. 차르르 차르르 구슬들은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주머니 밖으로 떨어진 구슬들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노무 자슥이...
신은 어둠 속에서 그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있었다. 인간이 아니니 인기척이 없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며 그의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가 이제라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스스로 시간의 도둑질을 멈추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시간을 훔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니까.
그의 도둑질은 실패했다. 시작할 때부터 예상된 결말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방금 실패를 맛 본 그는 벌써 다시 한번 신의 금고를 털어 볼 생각을 하고 있다. 또 다시 실패하겠지만. 혹시는 포기를 모른다. 신의 금고에서 시간을 훔치려는 대담한 시도는 그가 처음도 아니고 그만의 도전도 아니다. 시간이 아쉬워진 인간들은 너도 나도 시간을 훔치려 신의 방에 숨어든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실패한다.
시간을 훔치려는 시도는 신과 인간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며, 결과가 정해진 게임이다. 이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이 바닥이 나면 더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도 수많은 인간들이 시간을 훔치려 신의 방에 숨어든다. 매일 밤 인간들은 훔치느라 바쁘고 신은 그 놈들을 잡느라 한숨도 못 잔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지금 자신의 주머니에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 (신이시여 몽매한 인간들을 계도하려는 선량한 저에게 뽀찌라도 좀 떼어 주소서!)